조선시대는 어느 국가보다 다양한 기록이 남겨져 있는 국가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은 잘못된 경우가 많지요. 사농공상의 구별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파격적인 인재 등용도 많았고, 좋은 인재들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조선시대 문화 인재는 어떻게 모았는지, 경국대전에서는 어떻게 인사청탁을 막았는지, 그리고 서자들은 어떻게 관직에 올라 자신의 뜻을 펼쳤는지 살펴볼까요?
조선의 인재정책 1. 조선초기, 인재를 모아 문화를 융성시키다!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한 세종은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내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던 기구인 집현전을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 중심의 기구로 삼았지요.그리고 집현전에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집현전은 세종 때 설치되어 세조 때 없어질 때까지 37년이라는 짦은 기간 동안만 존속한 기구였으나, 세종대의 대표적인 학문, 문화활동이 완성된 공간이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이 이야기되는 기관입니다. 집현전에는 세종 때부터 단종때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갔습니다.
집현전에서는 주로 옛 제도들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과제들을 연구했습니다. 또한 수백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종의 책을 편찬했죠. 명실상부한 국가 연구기기관이었던 것입니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었습니다.
집현전의 의의는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다양한 인재들이 조선 초기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쌓고,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지요.
조선의 인재정책 2. 분경금지법으로 인사 청탁을 막다!
요즘도 인사청탁 문제는 어김없이 뉴스에 오르내리곤 하는데요. 인사청탁은 비단 현재의 문제만은 아닌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분경(奔競)’이라는 인사 청탁 문제가 많았습니다. 분경이라는 말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분주히 권세가를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뜻이죠. 분경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었습니다.
태조실록의 총서에는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다”고 하여 조선 건국 후 분경의 관행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종 원년인 1399년 8월 족중(族中) 3·4촌, 각 절제사(節制使) 및 그 대소군관(大小軍官) 등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관리가 서로 만나는 것을 금하는 교지가 처음 내려졌으며, 1401년(태종 1년) 5월에는 삼군부(三軍府)는 무신가(武臣家), 사헌부는 집정가(執政家)의 분경을 각각 규찰하는 임무가 왕명으로 부여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제도적인 조치가 거듭되던 끝에 1470년 (성종1년) 1월에 금지대상이 확정되었고, 이것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규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헌법에까지 분경 조항을 구체적으로 둔 것은 그만큼 분경을 철저히 금지해야 하겠다는 조선 왕조의 의지를 표방한 것이었어요.
요즘으로 치면 장관이나 도지사 등의 집에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사람은 곤장 100대, 유배 3천리에 처한다고 하여 분경하는 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규정을 정했지요. 권세 가문에 드나들면서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 원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헌법으로 규정해 관리의 인사청탁 부정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또한 청렴한 관리의 상징인 청백리에 대해서는 국가가 최대한의 예우를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인 장리(臟吏)의 자손에 대해서는 영원히 과거시험 자격을 박탈하는 등 엄격한 처벌을 가했습니다. 이렇듯 관리의 부정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 조선시대의 원칙이었습니다.
조선의 인재정책 3. 신분차별을 이겨낸 서얼 등용정책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서얼은 기술직 종사자, 관청 서리, 지방 향리와 함께 중인(中人)의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양반의 첩 자손이었던 서얼은 신분적 차별을 받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지요.
정조는 서얼 문제가 심각함을 인식하고, 1777년(정조1년) 서류(庶類, 서얼)들을 소통시킬 방도를 강구하여 절목(節目)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서얼들이 주요한 기관에는 진출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시정책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서얼에 대한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서얼은 중인으로 완전히 고착되었습니다.정조의 지시에 의해 마련된 1777년의 서얼 허통 절목은 서얼의 신분상승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법이었습니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1772년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려 서얼을 요직에 등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하는 등 서얼의 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구체화했죠.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정조는 1777년 서얼 허통 절목을 마련하여 서얼의 관직 진출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정조는 최고의 학문 기관인 규장각에 능력 있는 서얼들을 대거 등용했죠. 정조 시대 서얼 출신 학자들은 조선 후기 북학(北學) 수용과 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인재정책을 살펴보면 능력을 중시하고, 좀더 청렴한 사람들이 관리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만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학벌이나 집안을 보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피부색깔이나 겉모습의 차이가 아닌 진정한 인재를 발굴해 나가는 것이 현대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킬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조선시대의 인재 정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