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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첫 예술인단체 사회적 협동조합이 된 오케스트라 '하트체임버' 이상재 단장을 만나다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체임버를 아시나요? 비장애인도 다루기 어려운 클래식 악기를 다루고 악보를 익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완벽하게 연주를 하는 것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이 보조단원들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릅니다. 이어 악기를 들고 자리에 앉자 바로 불이 꺼집니다. 124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무대 카네기홀은 개관 이후 처음으로 공연장 불을 모두 끄는 암전(暗轉)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지휘자도, 악보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지막이 들리는 “시작”이라는 소리에 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곡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연주가 흘러나왔습니다. 이어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 등 14곡이 쉴 틈 없이 연주됐어요. 두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다시 켜지자 공연장을 가득 채운 600여 명의 관객은 기립 박수를 보냈고 이에 화답하듯 오케스트라단은 세 차례에 걸쳐 앙코르 연주를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실내악단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의 2011년 10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 연주회 장면입니다.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시각장애인으로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이상재(47·나사렛대 교수) 단장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며 당시 공연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이 단장을 비롯해 19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 주변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일이 현실이 됐던 것입니다. 이 단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해요.


“카네기홀 공연은 준비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공연 이틀 전 트롬본을 부는 단원의 어머니가 쓰러져 급하게 귀국하는 바람에 미국 현지 연주자를 구해 공연을 마쳤죠. 예상 밖으로 네 번이나 기립 박수를 받으며 공연을 마무리했고, 결국 해 냈다는 생각에 울컥하더라고요.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단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단장이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것은 2007년 3월입니다. 어렵게 음악과 연주를 배웠음에도 많은 시각장애인이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안마사 등으로 전전하는 현실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워서였는데요. 좋은 뜻임에도 단원을 모으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 당장 수입이 없기에 망설이는 사람이 많았지요. 일일이 직접 만나 설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인 만큼 선뜻 나서기에는 부담스러웠겠죠. 다행히 몇 달간의 모집 끝에 시각장애인 14명과 비장애인 7명이 뭉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창단 이후 지난 7년여간 예술의전당, 독도, 노숙인 쉼터, 사회복지시설이나 교정시설, 기업 등지에서 2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120여 곡 외워 지휘자·악보 없이 연주하는 단장


이상재 단장은 일곱 살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로도 시력은 나아지지 않았지요. 어둠 속에서 유일한 위안은 클래식 음악이었다고 해요. 특히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클라리넷 선율에 매료됐는데요.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전공해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앙대 음대 관현악과를 졸업하고 미국 3대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피바디음대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핸디캡은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했어요. 2년간의 박사과정 코스를 마치고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음악박사 학위를 받은 예는 피바디음대 15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또한 최고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린 테일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와 다르게 두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휘자와 악보입니다. 그 빈 자리는 피나는 연습으로 메워졌습니다. 볼 수 없으니 화음을 맞추기 위해 자기 것은 물론 다른 사람 악보도 외워야 했습니다. 매주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린 이유가 이것이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단원들이 외운 악보는 120여 곡입니다. 연습과정이 더디고 고된 만큼 찰떡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게 이 단장의 설명입니다.



  예술인 ‘사회적 협동조합’ 전환하여 경제적 자립 모색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대 밖 그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창단 멤버 중 6명이 생계 곤란을 이유로 떠나갔습니다. 계약직 교사나 안마사 일을 하기 위해 나간 건 그나마 좋은 경우지요. 수입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오케스트라를 아예 접는 경우도 많아요.


“시각장애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별로 없습니다. 사실상 안마사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트체임버 단원들의 오케스트라 활동이 더욱 절박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현재 활동 중인 단원들도 대부분 집안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공연 수익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카네기홀 공연을 기획한 것도 이 단장이 오케스트라 해산을 고민하다 시도한 마지막 도전이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기금을 모금하고 공연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공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면서 용기와 희망을 얻었지만 재정난 해소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어요.


이 단장은 협동조합 전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승인으로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국내 첫 예술인단체 사회적 협동조합이 됐습니다. 그는 협동조합 전환을 계기로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공연을 더욱 확대해 나갈 방침입니다.


올해는 중국·일본·러시아 공연 계획도 갖고 있어요. 오케스트라를 해외에 더욱 널리 알리고 싶다는 포부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단원들이 좀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단장은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단원들은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입니다.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 꿈을 주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케스트라가 되고 싶습니다.”


그들의 공연은 숨죽인 채 소리에 집중하며 듣게 됩니다. 단지 신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소외를 받고 사회적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단원들의 모습과 그들의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줍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컥함과 뭉클함에 눈물이 나기도 하지요. 클래식 음악이 어둠 속에서 힘들어하던 이상재 단장을 구해낸 한 줄기 빛이 됐듯이, 하트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