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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6·25 미망인들의 생존전쟁 스토리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가정에서 새로운 가장(家長)이 된 부인들. 이들이 없었다면 가정이란 공동체는 온전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았을까요. <전쟁미망인, 한국 현대사의 침묵을 깨다>(책과 함께)에 수록된 45명의 구술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6·25전쟁 사진


6·25로 남편을 잃은 부인은 최소 30만 명. 1963년 한 기사에서 “전국 미망인 수가 50만4877명으로 여자 26명에 미망인 한 명, 기혼 여자 10명에 한 명”이라고 기술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농·어업, 서비스업(상업), 제조업, 금융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계를 위한 활동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특히 행상, 농업 노동, 공장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 행상과 좌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6·25 전몰군경의 배우자가 흔히 할 수 있는 일은 행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장사나 채소 장사는 자본금이 없이도, 쌀장사나 옷 장사는 작은 밑천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 업구, 작은것은 업구 큰것은 할머니한테 맡겨놓구, 그때 떡장사도 하고 별짓 다했어요, 나도. 시장 바닥에서 인저, 한 10리, 20리 걸어 나와가지고 시장 바닥에서 팔았어요. 그리 안 하면 인저 노동자들 그런디 이고 다니면서 팔고. 애기를 그러고(업고) 다니니께 다 갈아줘요(팔아줘요). 쌀 됫박이라도 주고 다 갈아주더라고. 그래서 가지고 와서 팔아서 먹고, 또 그냥, 밑천이 있어야 또 장사를 하지. 그래서 살았어요. ___ 윤철희

양철 다라이라고 있는데, 그걸 살 형편이 안 돼서 누가 버린 것을 주웠는걸. (중략) 그 사람들이 배추를 자기네 손이 안 돌아가니까네 그걸 “공짜로 뽑아가라” 해가 그걸 뽑아가지고, 다라이 안에 담아가지고 안 시드러지게(시들게) 물 차가지고(뿌려) 보자기 덮어가 한 10리나 되는 데 (머리에) 이고, 머 물이 질질 내려와. 뒤에도 질질질질 내려오고. 이러다 갖다 파니까 30원도 되고 그렇더라구. 그때 연탄 한 장이 20원 했는가 그랬어. ___ 이경순


전쟁미망인은 행상을 다니며 가장 힘들었던 일로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기’를 꼽았습니다. 이들이 행상을 다닌 1950, 60년대는 물건 값으로 현금 대신 쌀, 보리, 콩 등 곡식을 받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곡식을 이고 다니다 쓰러지기도 하고, 후유증을 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골에서 물건을 팔면 돈을 안 주고, 콩, 팥, 깨 주로 그런 거만 주는 거야. 그런 게 옷감 가격 치고 그러면 이 짐이 무거워. 근 3년을 가까이 하고 나니 허리가 이기 너무 무거브고, 허리가 한번 치뻗브드니만 짐을 힘껏 던지고 내가 막 칵 까무러친 거야, 길바닥에서. 허리가 인자 무리를 가가지고. 허리가 무리를 가가지고 허리가 중심을 잃어노니, 지금도 허리가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세 개가 이짝으로 삐뚜러져서 곤칠 수가 없대. ___ 박원기

시골은 그때만 해도요 쌀 주면 쌀 받고, 보리 주면 보리 받고, 다 이고 오는데, 물건 가가지고 가서 물건도 한 보따리지. 애들 둘이 있으니까 자고 오지를 몬 해요. 남의 방 하나 얻어가지고 둘이 있는데 그걸 놔두고 걱정이 돼 자고 몬 와요. 요새도 몸이 아플라 하면 하두 여고 다녀서 모가지가 쑥 들어간다 카니까네. 이불 보따리만큼 곡식을 여고 다니니께. 내가 스물여섯에 장사를 해가지고 10년을 그러구로, 10년을 장사를 했어요. ___ 양희선


6·25전쟁 사진


■ 농업 노동과 공장 노동 등 미망인 89%가 경제활동


한편 전쟁미망인의 절반가량은 농업에 종사했다. 전쟁미망인은 논농사(못자리 작업, 모심기, 논 김매기, 농약 살포, 거름주기, 벼 베기, 타작 등)와 밭농사(밭갈이, 씨뿌리기, 김매기, 이식하기, 농약 살포, 거름주기, 수확 등)를 가리지 않고 했다.


안 해본 일이 없지. 논 매야지, 물 품어야지, 밭일 해야지. 산에 다니면서 나무를 해서 지금 내가 산을 안 가요. 산이 징그러워. 시골에는 똥 그거 퍼야 하잖아요. 그거 똥통이나 지고 가면, 여기(어깨)가 그냥 뻘겋게 멍이 들어요. 그런데 시동생들 시키기가 싫어. 따로 사니까 내가 해야 하니까. 그거 지고 갈 때가 제일 어려워. 갖다놓고는 우는 거야. 여기(어깨)가 너무 아프니까. 이게 그냥 이렇게 쫄려서 밤에 보면 여기가 시퍼렇게 멍들어. ___ 곽순진

아이구! 벼도 얼마나 베봤는지. 그러면 이 사이에 닳아가지고 빨개요, 벼가 이게. 벼도 베보고 뭐 논둑에 풀도 베고, 그거 살라면 또 돈 줘야 되니까. 그거 내가 다 하고. 피도 내가 뽑고, 또 모판에 비료도 내가 뿌리고, 뭐 모판에 약 치는 것도 내가 그, 그 약통 작은 집에 있으니까 내가 메고 가서 주고. 그 들판에서 그랬는데 우리 시아주버님이 보고 “참 저 아주머니는 치마를 둘러서 여자지 참 남자 하는 일 혼자 다 한다”고 이랬는데. ___ 이호영


공장 노동자가 된 이들도 많았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공업화 정책의 결과로 공장 노동자가 늘어났고 전쟁미망인들에게도 취업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때 전쟁미망인의 일부가 공장, 전매청 등에 취업했다. 이들은 대부분 별다른 기술이 없고, 학력이 낮아서 포장 작업이나 짐을 옮기는 일 같은 단순 노동을 했다.


취직을 해가지고 공장은 저기 대구 거 있는데, 그때는 치마를 입고 적삼을 입어야 해요. 여름에는 모시적삼을 (겨드랑이를 가리키며) 여그가 떨어져요. 땀이 나가지고. 그래가 도시락을 싸고 한 시간씩 걸어 댕겨요. 그래가 쪼금 벌어가지고 침산 공장 곁에다 집을 얻어가가, 그래가지고 15년을 댕겼어요. 15년을 댕겼는데 내가 지각을 한 번 안 했어, 한 시간씩 걸어 댕기도. 만날 일찍 들어가고 결근도 한 번 안 하고. ___ 양희선

에! 말도 못해요. 아침 8시에 출근하면 9시부터 일하잖아요. 그러면 5시, 6시까지, 퇴근 시간까지 일하고서는 거기 야간(근무)이 있어요. 야간은 그거 한 푼이라도 더 받을라고 그거 빠져나오지도 못해. 그 막 일이 밀려 나오는 거, 그 책임(량) 해야지 일어나니까. 막 새벽 2시, 3시까지 일을 했어요. 그 벤또(도시락) 싸가지고 가가 먼지 구덩이 속에서 밥 한 숟가락 떠먹고 또 일하고. 그러니까 위장병이 생기더라고. ___ 윤철희


1957년 서울시 세 개 지역(홍은동, 문래동, 가회동)에서 조사된 여성 직업 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있는 여성은 조사 대상 198명 가운데 9.6%인 19명만이 경제활동을 하는 데 비해 미망인은 조사 대상 80명 가운데 88.8%인 71명이 경제활동을 했다. 책을 집필한 이임하 씨는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원인뿐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 대해 들려준다”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인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이란 구도와 다르게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6·25 한국전쟁의 잊힌 역사를 일깨워준다”고 말했다.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저자
이임하 지음
출판사
책과함께 | 2010-06-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여성의 삶으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많은 현대사 학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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