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 역사의 산증인, 만화가 이현세의 서울 도곡동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 〈떠돌이 까치〉, 〈남벌〉, 〈천국의 신화〉 등으로 굵직한 역사를 써온 그는 예순이 넘은 지금도 웹툰 연재에 도전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진=만화가 이현세, c영상미디어 제공)
내 활동의 원동력은 땀과 열? 질투와 분노? 세상에 대한 화?(웃음) 이순(耳順)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성질이 별로 안 좋아서 지금도 그래요. 칠십까지는 남자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칠십이 넘으면 뭐, 성별 없이 살게 되겠지만.
볕이 잘 드는 작업실 책상에 앉아 한창 그림을 그리던 이현세 작가가 기자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학생들과 매년 떠나는 캠프에서 단체로 맞췄다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만화가 인생 40년, 예순한 살에 접어든 원로 만화가는 여전히 청춘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는데요.
그는 지난 2015년부터 인터넷 포털에 웹툰 〈천국의 신화〉를 연재 중입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웹툰 작가 신인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1979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한 이후 〈공포의 외인구단〉, 〈떠돌이 까치〉, 〈남벌〉 등의 흥행작을 내놓으며 만화계에 굵직한 획을 그은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면서 만화가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2년 전 세종대가 만화애니메이션학과를 처음 개설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교수직을 맡으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는 그입니다.
다독가의 조언, 고전을 읽어라
(사진=만화가 이현세, c영상미디어 제공)
내가 가르치는 운명은 아닌 것 같은데, 우연찮게 시작했지만 학생들을 통해 많이 배웠죠. 아이들의 열정, 왕성한 지식, 새로운 문명, 이런 것들이요. 좋은 시절을 보냈어요. 영광이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혼자 작업만 했으면 말 그대로 원시인으로 계속 지냈을 것 같아요. 학생들을 가르치려니 디지털로 말해야 하고, 인터넷으로 책도 나눠야 하고, 학교에 가면 세상 흘러가는 얘기를 계속 나누게 되거든요.
학생들과 소통을 잘하는 그는 학교에서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만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도 하지요.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대중적으로 가고, 만화계의 이정표로 남고 싶으면 작가주의를 공부하라고 조언합니다.
코믹 만화든 심오한 작품이든 신념을 갖고 그리라고 말해줘요. 그리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당당하게 법정에 서서 투쟁할 수 있으면 자신의 세상이 된다, 뭘 하든 자신에 대해 당당해져라, 그런 얘기를 많이 해줍니다.
(사진=만화가 이현세, c영상미디어 제공)
딱딱하지 않게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소통도 잘하는 열린 그지만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전 읽기인데요. 다독가로 알려진 그는 책을 통해 세상을 알고 만화가로서의 경쟁력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학생들에게도 꼭 전해주고 싶다고.
도대체 안 읽으니까, 고전을 읽는 것은 엄격하게 지켜요. 결국은 스토리의 힘이거든요. 그림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어휘력은 결국 다독에서 나옵니다.
〈삼국지〉와 세계사를 만화로 풀어내면서 다양한 분야를 해박한 지식으로 드러낸 그는 소문난 다독가입니다. 스스로 밝힌 작품 활동의 원천인 땀과 열, 질투와 분노만큼 책은 그를 이끌어온 대단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학생들,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책의 정보를 교환해요. 이번에 새로 나온 게 뭐라고 서로 알려주고요. 보는 책이 서로 다르니까 풍성하죠. 큰딸은 로맨스를 좋아하고 둘째는 추리소설을 좋아해요. 나는 어휘력이 풍부하고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 쓴 글을 좋아해요. 이건 직업의식인 것 같아요. 책을 사서 읽으면 내가 지불한 값어치만큼 가져올 만한 게 있어야 한다는 못된 생각이 있어요.
다음 꿈은 어른을 위한 동화 집필
그의 작업 스타일은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일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그는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몰아치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20대 혈기 왕성하던 시절부터의 스타일은 나이 예순이 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화가 이현세의 삶을 돌아보니 한세상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마워하고 있죠. 내 노력에 비해, 모든 것에 비해 잘 살았어요. 저는 늘 이문열 선생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문장을 신념처럼 갖고 다녔어요. 제 의지와 관계없이 얻은 명성은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비했죠.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는 더 나이가 들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겠다는 최종 꿈을 갖고 있습니다.
50대 중후반부터 얘기했어요. 칠십부터 동화를 하고 싶다고요. 그 말은 칠십까지는 남자로서의 만화를 그리고 싶단 열망이기도 하죠. 칠십이 지나면 성별 없이 살게 될 테니까, 더 넓은 세계를 손자나 손녀를 위해 쓰고 버릴 거예요.
구체적인 스토리도 생각해뒀다. 두 가지 버전의 동화를 계획하고 있는데, 하나는 손자·손녀를 위한 전통적인 동화고 또 하나는 노인을 위한 동화입니다.
치매와 함께 살아가는, 나와 같이 늙어가는 노인을 위한 동화는 내가 잘할 수 있죠. 내 얘기를 하면 되니까요. ‘아침에 일어나니 지퍼가 열렸다. 마누라는 치매가 시작되나 보다.’ 뭐 이런 것들은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현세가 요즘 읽는 책은?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한스 라트|열린책들
독일에서 1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신은 존재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 궁극의 질문을 유머와 놀라운 이야기 속에 녹여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심리치료사에게 신을 자처하는 수상한 사내가 심리상담을 의뢰하며 시작되는 유쾌한 소동이 담긴 책.
<벙커 다이어리>
케빈 브룩스|열린책들
납치돼 벙커에 갇힌 소년이 두 달에 걸쳐 쓴 일기를 담고 있다. 납치, 폭력, 마약, 고문, 강간, 살인 등 충격적인 요소가 가득하나, 자극적인 소재로 흥미를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파격적인 소재와 거침없는 서술이 통념을 깨뜨리는 작품.
<씬 시티>
프랭크 밀러|세미콜론
미국 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1990년대 화제작으로 영화 ‘씬 시티’의 원작이다. 강렬한 흑백 대비가 이뤄낸 철저한 폭력의 미학을 보여준다. 절대적인 선과 악의 개념이 혼재하는 이곳에서는 음모와 폭력이 난무하지만 그 속에 순수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