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여행

70대, 40대, 20대 각 세대 별 설 풍경 변천사

설 연휴도 어느 새 몇일 남겨두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윷놀이를 하며 웃음꽃이 피었고, 떡국을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헐벗었던 1950년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의 설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기억하는 설 풍경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세대 별 각각 달리 기억하는 설 풍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대나무 스키타고 흰눈 날리는 홍예문으로..



1950년대 전후의 한국은 기아와 혼돈, 전쟁의 참화로 뒤죽박죽이었고 입에 풀칠하는 문제에 골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옷가지 하나, 고기 한 근을 사는 데도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어림없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설은 달랐습니다. 가난 속의 풍요인지.. 밥과 떡 국, 고깃국은 물론이고 송편·시루떡·과일·조기 등 평소에는 구경도 못하던 진귀한 음식이 차례상에 줄줄이 올라왔습니다. 이때만큼은 전통시장·방앗간·이발소·목욕탕도 인파로 붐볐습니다. 때때옷으로 불리던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로 한껏 멋을 낸 꼬마 숙녀들이 골목에서 재잘거렸습니다. 


영화관은 가족 단위 관람객으로 북적거렸습니다. 교외로 나가면 양지에서 널을 뛰고, 그네를 타는 처녀 총각도 눈에 띄었습니다. 암울했던 그 시절에도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이 있었기에 가난에 짓눌린 서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어릴 적 설은 인천의 유서 깊은 홍예문과 그 일대를 분분히 날리던 함박눈에 대한 기억으로 어른거립니다. 평소에는 차량이 쌩쌩 달리는 도로지만 눈이라도 내릴 양이면 교통은 끊기고 가파른 경사길은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로 변했어요. 인천항 방면으로 길게 내리 뻗은 도로는 오간 데 없고 탐스런 눈으로 장식된 스키 코스가 아이들의 동심을 흥분시켰답니다.


당시 ‘대나무스키’는 이 동네 겨울 스포츠의 백미였는데요. 큰 대나무 줄기를 반으로 쪼개어 매듭 부분을 납작하게 밀고 앞쪽은 불로 그을려 휘게 만든 놀이기구였습니다. 그걸 타고 홍예문에서부터 인천부두까지 거의 1㎞ 가까이 되는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달렸습니다. 놀이가 심드렁해지면 다들 홍예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연을 날렸는데요. 항구도 시 인천의 겨울바람은 연날리기에도 제격이었습니다.



인공으로 만든 놀잇감을 전혀 갖지 못했던 저희 세대의 아이들은 자연과 타협하고 함께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홍예문 일대의 명물 대나무스키가 그랬고 썰매, 그것도 없으면 눈을 뭉쳐 던지는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연날리기,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 등 자연이 주는 소재로 재미를 빚어내는 게 50~60년대 가난한 시절 어린이의 풍경이었습니다. 두 세대가 더 지난 요즘 아이들에게 한겨울 함박눈과 칼바람 속에 가쁜 숨을 몰아쉬어본 기억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놀다 허기진 배를 안고 집에 오면 떡국을 만들다 남은 가래떡이 난로 위에서 ‘피쉬식’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노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할 때 쯤이면 멀리서 청포묵 장수, 찹쌀떡 장수, 만두 장수의 ‘OOO 사려~’라는 구성진 울림이 자장가처럼 귓전을 간질였고, 이렇게 설날은 저물었습니다.



  온 가족이 안방에 둘러앉아 윷놀이 놀이를 즐겼어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노엘(Noel)’의 의미를 알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노엘이라고 하는데 노엘 저녁식사는, 예를 들면 상속받을 성(城)이나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에게는 중요한 행사였어요. 귀족 아비가 아들에게 내리는 벌이 이 노엘 만찬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공무원 시험에 낙방하고 노엘 만찬에 가지 못해서 우울해하던 프랑스 친구와 연말을 같이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설날에는 이런 배제가 없지요. 자기가 싫어서 안갈 수는 있지만, “너는 이런 걸 못했으니 올 설에는 오지마라.”와 같은 건 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 부부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서울 개봉동 할머니 집에서 컸고, 삼형제가 화곡동 우리 집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될 때였습니다.



저에게 설의 기억은 원래 내가 살던 할머니네 집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멀리 시골로 가는 친구들이 은근 부러웠지요. 1970년대의 설은 먹을 게 아주 많았고, 또 간만에 TV가 그것을 온종일, 그것도 며칠 동안 방송했습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그때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눈에는 너무 너무 황홀했습니다. 집에서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윷놀이를 즐겼습니다. 



  단체로 영화를 보고, 놀이공원에 가서 즐기던 널뛰기와 투호놀이가 기억에 남아요



저는 경기도 광주, 그것도 도심에서 떨어진 만선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조금은 더 번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곤지암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 마을에는 농사짓는 분이 더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눈으로 뒤덮인 들판을 내달리는가 하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어 ‘인증샷’을 찍기도 했습니다.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숲에서는 맛보지 못할 자연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어요.


설은 제가 ‘다른 사람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스타가 되는 날이기도 했는데요. 가만히 있어도 귀여움을 독차지하련만 집안 어른들 앞에서 노래와 댄스 등 갈고 닦은개인기를 한껏 뽐내곤 했답니다.


웃고 떠들다 지치면 언니·오빠들과 단체로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설이 준 행복이었어요. 특히 애니메이션 영화는 어린 우리에게 상상의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더불어 어른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 즐기던 널뛰기와 투호놀이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가족의 고마움을 되돌아보게 하는 설날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70대, 40대, 20대가 기억하는 설 풍경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어요. 사회가 변화하면서 세대별로 기억하는 설 풍경도 역시 달랐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던 시대라도 먹을거리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웃과 함께 하는 즐겁고 훈훈한 설이 되길 바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