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7080'이나 불후의 명곡 등을 굳이 예시로 들지 않아도, 그때를 생각하면 유난히 70, 80년대에 좋은 노래가 많습니다. 어느새 추억이 되어 잊히는 노래들이 최근 K-팝으로 다시 불리기도 합니다. 그 시대와 삶을 대표하고 감성을 달래준 노래를 잠시 떠올려 볼까요.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남산 산책을 나갔습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때마침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하는 대목에서 구보 씨는 잠시 인생의 겨울에서 어디쯤 와 있나 싶었습니다. 울컥하며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도 났습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부모)가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유행가는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유행가엔 서민의 삶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복되고 나서 미군이 들어오자 '미8군 쇼'는 가수의 등용문 구실을 했습니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씨 알 겁니다. 그녀의 세 딸이 김시스터즈를 만들어 주한미군들을 열광시켰습니다.
패티 김, 신중현, 이금희, 서수남, 윤복희, 한명숙, 임희숙 같은 가수도 미8군 무대에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트로트나 신민요 영역에선 한복남, 현인, 박재란, 이해연, 명국환, 권혜경, 이미자 씨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이미자는 1950년대 후반 '열아홉 순정'으로 인기를 얻은 뒤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으로 일약 대스타로 떠올랐습니다. 1961년엔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대단했습니다. 택시기사의 유니폼이 모두 노란색으로 바뀔 정도였으니까요.
1963년엔 현미의 '밤안개', 1965년엔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가 히트곡이었습니다. 1966년엔 최희준의 '하숙생', 1967년엔 남진의 '가슴 아프게', 정훈희의 '안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1969년엔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같은 심금을 울리는 명곡들이 잇따랐습니다.
작곡가 겸 가수 신중현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그는 '애드4'라는 당대 최고 그룹을 조직해 1963년 '빗속의 여인'과 '커피 한 잔'을 발표했습니다. '미인'은 지금도 꾸준히 불리는 명곡입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가요계는 트로트가 대세였습니다. 남진이 군복무 하러 월남에 갔다 온 사이 나훈아가 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자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낸 허리춤을 선보이며 '님과 함께'와 '그대여 변치 마오' 같은 노래로 대중을 열광시켰습니다.
나훈아와 함께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이룬 겁니다. 트로트에 로큰롤을 가미한 댄스곡을 선보인 남진은 아마 처음으로 노래에 춤을 가미한 남자 가수였을 겁니다. 요즘 아이돌 그룹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진과 나훈아 두 사람이 리사이틀(극장 쇼) 공연을 하면 그 지역 공단 여공들이 단체로 결근하는 탓에 공장들이 하루나 이틀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재즈풍 노래가 인기를 끌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통기타 붐도 대단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된 겁니다. 1971년 은희의 '꽃반지 끼고'가 아르페지오 선율에 힘입어 주목을 받았고, 김민기와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 대학가 캠퍼스와 커피숍을 장악했습니다.
김정호,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의 노래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격정과 허무감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엔 가요 규제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가수들은 생계를 위해 CM송(광고 노래)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윤형주나 김도향의 CM송이 한 편의 시처럼 빛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암흑기에도 이정선, 정태춘, 조동진 같은 가수는 시대의 우울을 노래했습니다. 1979년엔 윤시내의 '열애'가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마치 한 마리 사자가 포효하는 듯 가창력이 대단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조용필의 시대였습니다. 1980년 '창밖의 여자'와 '촛불'을 발표해 그해 모든 가요제의 대상을 휩쓸었습니다.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를 비롯해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고 늘 새로운 음악적 실험을 했기 때문에 모름지기 '가왕(歌王)'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후 이용의 '잊혀진 계절', 임병수의 '약속',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이선희의 'J에게' 같은 발라드 계열의 노래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장르가 됐습니다. 1980년대 음악의 주류였던 발라드는 계속 발전해 이문세, 변진섭, 윤상, 신승훈 같은 가수들이 이끌어갔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가 우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음악 전문가의 해설을 보았더니, 이 시기에 다양한 장르의 대중가요가 공존했고 여러 가지 음악적 실험이 이뤄졌다 합니다. 김현식, 들국화,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동물원 같은 가수들은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서도 가수로서 확고한 입지를 만들어간 것입니다. 라이브 음악의 강자들이 TV에 나오지 않고도 노래 실력만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겁니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구보 씨도 '난 알아요'를 방송에서 처음 봤을 때(들은 게 아니고), 노래가 아니라 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래도 아니라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친구들이 가수란 노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대중문화계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힙합 장르를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린 선구자로도 인정받았습니다. 그 후 수많은 그룹이 힙합으로 무장하고 가요계에 바람처럼 등장했다 이슬처럼 사라져갔습니다. 다만 고(故) 김광석이나 고 신해철은 오롯이 자기만의 음악 영역을 만든 거 같습니다.
2000년대 이후의 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적 자식이나 손자뻘쯤 될 것입니다. 호소력 있는 가창력보다 화려한 춤 솜씨가 지금의 대중음악계를 지배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랩이 많이 들어간 요즘 노래들은 도대체 무슨 소린지 들리지가 않습니다. 우리 때 자주 듣던 유행가 가사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튼 회식 때 2, 3차로 노래방에 자주 가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가수다'나 '히든 싱어' 같은 방송의 노래 자랑 프로그램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잖습니까. 그만큼 사람들이 유행가에 관심이 많다는 증거겠지요. 앞으론 유행가가 주로 10대만 겨냥하지 말았으면 싶습니다. 중·장년층이나 구보 씨 같은 노년층도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들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박태원의 세태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톺아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