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쿡방(요리 방송)'이 대세였다면, 2016년 올해 방송가에는 '집방(집 꾸미기 방송)'이 핫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집을 수리하고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실내를 꾸미는 것을 소재로 하는 방송입니다. tvN '내 방의 품격'과 '렛미홈(4월 예정)', JTBC '헌집 줄게 새집 다오', XTM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수방사)' 등 각종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집 꾸미기 방안을 제시합니다.
반면 서점가에는 올 초부터 미니멀리즘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뜻하는 미니멀리즘은 '집에서 사용하는 잡다한 세간을 내다버리고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단순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됩니다.
▩ 투자 대상에서 삶을 즐기는 공간으로 바뀌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 아파트에 3년째 전세로 살고 있는 워킹맘 박지혜(34) 씨는 신혼 초부터 "인테리어는 내 집 마련 후에 할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줄곧 "남의 집을 보기 좋게 꾸며봐야 전세 만기 시점에 돌아오는 건 허무함뿐"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최근 그는 집 안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을 통해 집방 프로그램을 접한 뒤 "꾸미는 데 돈이나 힘이 생각만큼 많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발품을 팔아 세련된 디자인의 소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해 배치하고, 인테리어 포인트 벽지와 스티커를 이용해 변화를 주니 훨씬 보기 좋아졌죠. 박 씨는 "잠깐 머물 집이라고 대충 하고 살 때보다 만족감이 높아졌습니다. 앞으로 살면서 조금씩 변화를 줄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부모 세대는 인테리어 자체를 터부시했습니다. 전세나 월세로 사는 집을 꾸며봐야 돈 낭비이므로 그 돈을 모아 하루빨리 집을 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시내 집값은 월급쟁이들이 꾸준히 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전·월세로 지내는 기간이 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홈 퍼니싱(Home Furnishing : 가구, 조명, 벽지, 소품 등으로 가볍게 집을 꾸미는 것)이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집으로 도피하는 집순이, 집돌이들이 늘어난 것도 집 꾸미기 열풍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한 온라인 시장조사 전문업체가 19~5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집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고 답한 사람은 81.9%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집에 머무르는 동안 질 좋은 휴식을 취하고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집 꾸미기에 공을 들입니다.
집 꾸미기 정보를 공유하려는 이들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집을 아늑하게 꾸민 뒤 사진을 찍어 누리소통망(SNS)에 올려 온라인 집들이를 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인테리어 정보 공유 인터넷 카페 '꿀하우스(www.ggulhouse.com)'에는 전문가 뺨치는 솜씨로 집을 꾸민 이들이 자신의 경험담과 사진, 제품 정보를 올리며 교감하고 있습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최근의 집 꾸미기 트렌드와 지난해 쿡방, 먹방 열풍 저변에는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의 치유받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습니다. 스스로 음식을 해 먹으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집을 꾸미면서 안정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치유 욕구는 지속되기 때문에 인기 아이템이 의식주로 전환된 이후에는 또 다른 형태의 힐링 아이템이 떠오를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습니다.
▩ 집을 비워낼수록 삶의 질이 높아지는 '미니멀리즘'
집을 꾸미는 데 열중하는 이들만큼이나 집을 비워내는 데 가치를 두고 사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5년 차 직장인 정호준(33) 씨는 고향인 부산을 떠나 대학 시절부터 10여 년간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집 안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미기에 바빴죠.
그러나 취직한 뒤부터 집 정리가 힘들어졌고, 퇴근 후 물건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집에 돌아올 때면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는 올해 초 우연히 방송을 통해 일본에서 '단샤리(斷捨離 : 끊고 버리고 떠난다는 뜻)' 열풍이 불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과감하게 집 정리에 나섰습니다.
정 씨는 "몇 년째 쓰지 않는 물건, 입지도 않는 옷들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련 없이 버리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집 안에 최소한의 물건만 두고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에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단샤리'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는 메모지 한 장 버리지 못했지만 현재 10평 남짓한 방에 옷 10벌, 액체비누 하나, 밥·국그릇, 요·이불·베개 등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내 가치라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물건은 가질수록 욕망만 커졌다. 오히려 물건을 줄일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줄일수록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논리는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났다가 복귀한 뒤 가장 먼저 케케묵은 서류와 오래된 장비를 모두 없앴습니다. 회사를 살려낼 획기적인 제품 고안에 열중하기 위한 결정이었죠.
또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둘 다 늘 같은 옷만 입고 단순한 스타일을 고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살아가는 데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 자신의 삶과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국내에서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카페 '미니멀라이프(cafe.naver.com/simpleliving)'에는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버린 뒤에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경험담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죠.
대부분 "겨울 동안 쌓아둔 케케묵은 옷과 쓸모없는 물건들을 버리고 나니 여유가 생겼고, 더욱 경제적으로 살게 됐다", "청소하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중고로 판매한 수익금이 쌓여 저축액도 늘었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입니다.
집 꾸미기 열풍과 단순한 삶 추구의 사이. 무엇이 행복한 길인지는 자신이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삶을 즐기고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느 방식이라도 좋습니다. 공간을 나에게 맞춘다면 셀프 인테리어로 누구보다 행복한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