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당대의 석학으로 꼽힙니다. 사회와 문화, 역사에 대한 깊고 애정 있는 시각으로 세상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우리 사회의 원로입니다. 그는 “한국에는 경쟁 상대조차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상생의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며 “이런 문화를 가진 것은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커다란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이 전 장관은 2013년 새해 첫날 KTV 를 통해 문화국가 대한민국이 나아갈 상생의 길을 이야기 했는데요. 한국 사회를 향해 던지는 원로의 싶고 따스한 목소리를 전달해드릴게요.
2012년 대한민국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우스푸어와 워킹푸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세대간, 계층간 갈등도 심해졌죠. 소득·주거·취업 분야에서는 양극화 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치열했던 제 18대 대통령선거도 한국 사회에 커다란 분열과 대립을 불러 일으켰어요.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월 1일 KTV에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 ‘2013 코리아 새희망 새시대’에 출연한 이어령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말은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합니다. 이 전 장관은 새 정부에 많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향한 조언을 시작으로 한국이 겪는 갈등의 원인과 이를 치유할 수 있는 한국문화의 깊이를 함께 논하며 애정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정부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정부 자체가 새롭게 변했다고 생각해서지요. 언론은 새 정부에 계층 갈등을 허물어 줄 탕평책을 주문합니다. 하지만 새로워져야 할 대상은 정부가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들입니다.
이 전 장관은 선거는 국민이 했다고 지적합니다. 국민이 선택해 세운 정권이라는 말이죠. 선거 때 누구를 선택했던 정부는 우리 국민의 것이며 국민에 의해서 국민을 위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투표권자들이 서로 안아줘야 정치인들도 따라하기 시작하죠. 우리 스스로가 먼저 관용의 모습을 보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 전 장관은 국민이 움직이면 정부는 알아서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새로 투표해 대통령을 100번 다시 뽑아도, 국민이 그대로라면 변화는 없습니다. 반면 국민이 새로워지면 정부도 새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다 같이 변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국민이 새로워져야 정부가 바뀐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였기에 여러 갈등 요인이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 전 장관은 갈등이 새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물밑에 쌓인 퇴적물이 선거라는 물살을 타고 떠오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극심한 갈등의 요소가 떠오르게 됐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상생을 논하기에 앞서 할 일이 있습니다. 왜 이런 극심한 갈등과 양극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게 됐을까요. 한국 고유 문화에서는 이정도 수준의 양극화를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문화에는 양쪽을 모두 아우르며 해원상생하는 풀이의 철학이 깊게 배여 있습니다. 언어에서도 이런 면면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원 섭섭이나 버려둬라는 모순어법이 그렇지요. 시원한데 섭섭합니다. 버리라면서 그대로 놔두라는 말을 합니다. 이를 중간언어라고 합니다. 흑과 백을 매번 명확하게 나누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가 섞이며 새로운 맛을 내는 비빔밥, 다섯 가지 색상이 모여 서로 얽혀 색다른 맛을 자아내는 오훈채의 나물문화가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형태입니다.
나를 비롯한 한국의 80대는 서로 다른 계층을 향한 증오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경험했다”며 “서로를 보듬어 주는 치유·상생의 문화만이 사회적 갈등을 치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상생은 어떻게 시작될까? 이 전 장관은 먼저 로스 로스가 아닌 윈윈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한국이라는 큰 테두리 내에서 전체 그림을 그리려면 곳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지 않고는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가기 힘들죠. 그는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노인과 젊은이들 사이의 갈등도 소통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욕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왜 그 추운 날 80을 넘긴 노인들이 제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투표장에 나왔을까. 바로 보수 골통이라고 비웃는 그 손자들의 자유와 앞날을 지켜주기 원해서이지요. 고생하며 이룩한 나라를 그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분들이 이룩한 놀라운 기적들을 생각해 보세요.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그들의 땀과 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완고한 것 같은 노인들의 생각에 지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거꾸로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뭉쳐서 한결같이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위험시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비판적 지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상처를 보듬는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상생은 이해에서 시작한다.
그는 소통을 위해서는 주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이 나쁜 사람 두 명 불러서 이야기하라면 눈만 껌벅거리다 말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먼저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할 환경과 나눌 문화 콘텐츠가 뒷받침 되어야 해요. 이 전 장관이 항상 문화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이유입니다. 성숙한 문화를 가진 사회는 상처를 치유하며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의 힘은 소프트 파워에서 나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파악한 미국은 문화의 힘을 키워 나가기 위해 주력합니다. 그들의 문화 전략은 매우 고차원적입니다. 정치나 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아무것에도 매여 있지 않은 순수한 문화입니다.
이 전장관은 한국 문화도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놓치지 말아야 할 점도 있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면 고유의 우월한 DNA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우리만의,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우월한 문화 DNA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쉽게 문화 제국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곳곳의 전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며 인정받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를 들썩이는 한류 스타의 저력은 문화에 있는데, 한국적인 것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한류가 K-pop이라는 형태로 접근했기에 큰 저항 없이 온 지구로 펴져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듯 문화는 그 자체로 즐겁고 나눌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한류가 인정 받았고, 앞으로도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비단 한류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한국 고유의 문화에 있는 상생의 정신과 포용의 문화가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풀어야 신바람난다.
이 전 장관은 한국의 문화적 역량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몇 가지를 꼽았습니다. 먼저 국제사회에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올라온 유일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죠. G7 국가는 다른 나라를 군사적, 경제적 힘으로 굴복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며 지금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릅니다. 수 많은 침략을 받으며 고유의 민족성을 지켜내며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를 키워나갔어요.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승부를 마친 다음상대를 포용해 왔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그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많은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이는 서로 다름을 넓고 깊게 포용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의미지요. 우리는 주위에서 싸우면 그만 싸우고 풀라고 말합니다. 풀지 않으면 신바람이 나지 않지요. 신바람의 대전제는 푸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잘못한 일을 풀어주는 것을 해원이라고 합니다. 원한을 품으면 상생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푸는 것이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관용과 해원 사상입니다. 우리가 가진 전통에 이런 깊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세계를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유·평등·박애. 프랑스 혁명의 근본 정신이다. 이 세가지가 합쳐지며 서구 근대 국가가 형성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정신이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유는 경제원리에서 평등은 정치 사회원리로 양립할 수 없는 극으로 치달아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어우른 사회는 문화원리인 박애의 힘에 융합될 수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박애는 동지애, 우애의 의미인 프라테르니떼(fratenite)였습니다. 그 때문에 좌우의 이념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 체 오늘에 이른 것이죠.
한국은 다릅니다. 모순을 조화하고 원한을 푸는 생명력 고난을 극복하는 끈질 긴 민중들의 지혜가 여러 사상을 융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한민족에는 무한 경쟁의 자유와 더불어 사는 평등의 양립불능의 것을 한 솥에 끓일 수 있는 가마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과 물은 서로 상극하나 그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결국 문명을 뒷받침하는 것은 문화입니다. 정치나 경제로는 풀지 못하는 갈등을 문화는 치유하며 상생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 중 단연 빼어난 것이 한국의 문화입니다. 한국에는 심각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동시에 이를 치유할 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명백합니다. 포용하고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난해의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한 해를 힘차게 살아 갈수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