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1694~1776, 재위 : 1724~1776)는 조선시대 어느 왕보다도 서민 군주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영조는 추운 겨울에도 비단이 아닌 무명옷을 즐겨 입었고 초식 위주의 소박한 수라상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영조 자신도 "내가 이렇게 건강한 것은 무명옷에 초식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영조가 서민 군주의 면모를 보인 것은 18세에서 28세까지 궁궐이 아닌 사가(私家)에서 생활한 경험이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민군주를 지향한 영조의 면모는 정책으로도 연결되었으니 탕평책과 균역법의 실시, 청계천 준천사업 등이 대표적인 정책이에요.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크게 전세와 공납(貢納), 군포(軍布)였어요. 공납의 문제는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어느 정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해결이 되었으나, 군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에 세금으로 납부하는 군포의 부담은 17세기 이후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1750년(영조 26년) 5월 영조는 직접 창경궁의 홍화문 앞에 나갔습니다. 군역의 부담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는데요.
이후 영조는 양인(良人)들이 부담하는 군역에 관한 절목(節目)을 검토하고, 7월에는 양역(良役)에 관한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적극적인 여론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영조는 양역의 개선 방향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해 7월 11일 균역청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였습니다.
균역법은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2개월에 1필로 납부하는 것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반값 군포'를 실현한 정책이었었어요.
균역청사목 : 균역법의 주요 내용과 균역청에서 관장하던 사무를 수록하여 놓은 책
한 집에 장정이 3~4명이 있을 경우 군포의 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냥 정도가 되었는데, 당시 1냥의 가치는 현재로 환산하면 4만~5만원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어요.
더구나 군역 대상인 16세에서 60세의 장정이 아닌 경우에도 황구첨정이나 백골징포라는 명목으로 군포가 징수되었고, 인징이나 족징이라는 이름으로 이웃이나 친척의 군역도 부담해야 하는 상황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균역법의 시행으로 정당하지 않은 방식의 군포 부담을 없애는 한편 군포의 부담이 반으로 줄게 되었어요.
균역법의 실시로 국가의 재정 수입이 줄어들자 영조는 부족한 재원마련을 위한 작업에도 들어갔습니다. 우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있는 재력가들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게 했습니다. 이들은 양반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호적에 유학(幼學)이라고 칭하던 자들로서 종래에는 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계층이었어요.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계층들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칭을 주는 대신에 군포를 징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균역법은 백성들의 부담은 반으로 줄이고 양반층, 특히 땅이 많은 지주들의 부담은 크게 한 정책이었지만 양반층 자체에 군포를 부과하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양반들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가호(家戶)마다 군포를 납부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양반층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서민 군주를 지향한 영조는 52년간 재위하면서 사치 방지를 국정의 철학으로 삼고, 백성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정책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어요. 균역법은 이러한 정치 철학이 가장 잘 구현된 정책이었습니다.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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