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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

장동산림욕장, 발가락이 좋아하는 계족산 황톳길 여행

발가락이 좋아하는 여행
대전 계족산 황톳길

 

(사진=이송이 작가)

 

나를 위한 여행? 오늘은 발을 위한 여행이다. 무관심을 당연하게, 어두움을 일상으로, 온갖 고생 마다하지 않고 나를 지탱하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면서도 제대로 보상 한 번 받지 못하는 굳은살투성이의 못생긴 발을 오늘은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날이다. 한 번쯤 안쓰럽게 어루만져주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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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도처에 어디어디에서 뽑은 걷기 좋은 길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맨발로 물컹물컹 간지러운 찰흙의 황톳길을 걷는 독특한 경험을 안겨주는 길이 있다. 여행 전문 기자들이 꼽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선’에 선정된 숲길이기도 하다.

 

대전 계족산 황톳길이다. 태생부터 황톳길은 아니었다. 사람이 애써 숲길 한편에 황토를 깔았고 그 위로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동네에 숨어 있던 흔한 뒷산의 임도는 이 황톳길 덕분에 어느새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대한민국의 배꼽에 위치해 있으니 사방팔방에서 오가기도 쉽다. 계족산 황톳길이 시작되는 장동산림욕장은 대전역에서 차로 20분, 신탄진 톨게이트(TG)에서 15분 거리다. 어디를 가든 흔한 경유지가 되던 신탄진이나 대전이 이제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이유가 생겼다.

 

 

걷다 보면 황토가 해주는 발마사지

 

(사진=이송이 작가)

 

“황톳길에 한 번 가보자”고 한 건 엄마였다. 환갑을 넘긴 어느 날부터인가 무릎이 시큰거려 등산도 포기하고 평지만 살살 걷고 싶어 하는 엄마가 먼저 나서서 걷자고 한 길이니 힘들지는 않을 거라는 안심이 들었다. 아마 너나 할 것 없이 무릎이 시큰거리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거기 좋더라’는 입소문이 난 길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황톳길이라고 하니 마른 황토가 흙과 함께 섞여 있는, 그래서 아주 벗어버리고 맨발로 걷기에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드는 잔돌이 많은 길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계족산 황톳길은 마른 흙이 아니라 찰흙이 곱게 깔린 길이었다. 어릴 때 갖고 놀던 그 찰흙의 질감이다.

 

드디어 딱딱한 신발을 벗고 발가락은 부드러운 흙을 만난다. 맨발로 산을 걸어본 일이 얼마 만인가. 신발을 벗는 것이 발가벗는 것처럼 수줍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발바닥이 더 이상 신발에 의지하지 않고 저 혼자의 힘으로 땅 위에 우뚝 선다. 발 전체가 온전히 땅에 닿는다. 뒤꿈치에서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땅을 디디는 발의 관절 하나하나가 새롭다. 겨우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발이 몸무게보다 무거울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발바닥에 차례로 닿는 황토의 느낌이 따듯하다. 


      
산책길의 초입은 사람들의 수많은 발로 다져져 황토의 질감이 제법 단단하고 매끄럽다. 떨어진 나뭇잎은 황토흙 속에서 어느새 ‘압화’처럼 무늬를 새기며 흙에 박힌다. 조금 더 걷다 보면 흙은 물러지고 발가락 사이사이로 황토흙이 ‘삐죽’ 삐져나온다. 황토가 해주는 발마사지다.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어린애들이다. 곳곳에 쌓여 있는 황토 더미는 아이들에게 자연의 흙놀이터가 된다. 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도 흐뭇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달라고 조르는 대신 흙을 만지며 노는 모습이 기특할 정도다. 숲 속에는 황토흙 더미 말고도 아이들을 위한 정식 놀이터도 마련돼 있다. 숲 속에 오도카니 들어선 놀이터에 아이들을 부려놓고 어른들은 그제야 평상에 다리를 뻗고 눕는다. 나무 아래서 누리는 평온한, 따로따로의 쉼이다.

 

계족산 황톳길은 총길이가 14.5km나 된다. 장동산림욕장 안에 깔려 있는 황톳길은 반반의 길이다. 반 정도는 황톳길을, 나머지 반은 임도로 남겨놓아 그냥 신발을 신고 걸어도 된다.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운동화만으로도 편한 길이다. 순환형으로 돼 있어 중간에 돌아내려오지 않고 한 바퀴를 쭉 걷는다면 4~5시간 정도가 걸린다.

 

피톤치드 마시며 즐기는 숲 속 오페라

 

 

(사진=이송이 작가)

 

닭의 발을 닮았다는 계족산의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이 계절엔 고운 단풍도 만나고 저 멀리 아련한 대청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느 틈엔가 대전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420m 산 중앙에는 계족산성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긴 이 황톳길을 만든 건 지자체가 아니다. 황톳길의 시작은 이 지역 기업가의 소소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했다. 대전의 한 기업인이 하이힐을 신은 여성과 우연히 산을 찾았다가 발이 불편한 여성에게 신발을 벗어주고 자신은 맨발로 산길을 걸어 내려왔는데 그날 밤 아주 꿀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

을 지역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기업인은 계족산 한편에 맨발로 걷기 좋은 황토를 깔았고, 노부모는 말할 것도 없이 어린아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계족산 황톳길이 탄생했다.

이곳에 황톳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입에서 20~30분만 길 따라 올라가면 너른 숲 마당에서는 나무들을 배경삼아 예상치 못했던 숲 속 오페라가 펼쳐진다. 판판한 돌들과 정자, 나무 데크와 벤치, 여기저기 펼쳐진 돗자리는 관객석이 되고, 숲 속에 소박하게 들어앉은 데크는 무대가 된다. 초록의 숲을 배경으로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보는 오페라는 낭만적이고도 상쾌한 즐거움을 준다. 


 

(사진=이송이 작가)


배우와 관객 사이에 거리는 없다. 배우는 시시때때로 관객을 향해 다가오고 관객은 곧잘 무대로 이끌려나간다. 숲 속 음악회에서는 훤히 노출된 백스테이지마저 즐거운 볼거리다. 그렇다고 그저 그런 시시한 공연은 아니다. ‘오페라의 유령’, ‘세비야의 이발사’ 등 정식 오페라 무대에서 펼쳐지는 곡들을 비롯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가곡까지, 이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의 연령을 고려한 공연 프로그램은 다채로우면서도 퀄리티가 있다. 배우들 스스로 10만 원짜리 공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의 수준이다.


 
테너와 바리톤, 소프라노를 갖춘 다섯 명의 남녀 배우가 한 시간 동안 빚어내는 소리의 향연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배우들의 기세와 열정이 관객에게 전이되면 사람들은 어느새 숲과 음악이 주는 자연의 기운에 생의 활기를 얻는다.

 

산과 숲이 무료인 것처럼 공연도 물론 무료다. 2007년에 시작한 공연은 벌써 10년째 숲 속 무대를 지키고 있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면, 비가 오지 않는 한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무료 오페라 공연이 펼쳐진다. 대전 시민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꼭 14.5km의 황톳길을 모두 걷지 않더라도 황톳길을 살짝 맛보고 숲 속 오페라만 즐겨도 이 길을 찾은 보람은 충분하다. 내려올 때 황톳길이 살짝 미끄럽다면 숲 쪽으로 평평하게 이어진 데크 길로 걸어 내려오면 된다.

 

10월도 벌써 반이 지나갔다. 가을 단풍은 봄꽃처럼 유난스럽게 피었다가도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지고 만다. 그해의 단풍은 그해밖에 볼 수 없고, 숲 속 오페라도 10월까지다. 긴 연휴의 피로가 아직 그대로라면 계족산 황톳길로 가자. 발을 위로하면 어느새 마음도 위로를 받을 테니까.

 

 

글/사진=이송이 작가

 

 

(이미지=대전 대덕구 문화관광과 홈페이지)

 

교통

기차 서울-대전, KTX 매일 수시(05:15~23:30) 운행, 약

 1시간 소요 버스 서울-대전, 매일 수시(06:00~21:50) 운행, 약 2시간 소요

 

숙박
장동체험마을 대전 대덕구 장동 839, jangdong0.modoo.at

장동게스트하우스 대전 대덕구 산디로15번길 63, 070-4158-3360

유성호텔 대전 유성구 온천로 9, 042-820-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