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안내하는 빠른 길
신고리 원전 공론화가 끝났다. 결론은 명확했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토론이 서구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닐뿐더러, 건강한 상식으로 무장한 시민성이 전문성과 결합될 때 얼마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공론화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론화란 ‘사적 개인과 공적 의제를 매개하는 공론장(公論場)의 형성과정’이다(Habermas). 공론장이란 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숙의(熟議)하며 국민과 정치권, 국민과 정부가 소통할 수 있는 공적 공간(public space)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한 의견 즉, 특정 사안에 대해 여럿이 함께 논의하고 숙고하여 그 사회의 공적 이익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합의한 공공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 부른다.
공론이란 단순히 숙의 과정을 거쳐 숙성된 의견을 일컬을 뿐 아니라 공익에 가장 부합하는 의견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사회구성원의 의사를 모아놓은 중론(衆論)과도 다르고, 중론의 평균치를 낸 여론(與論)과도 다르다. 공론이란 플라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한 시대의 정론(正論 true opinion)이고, 공론화는 이 정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다만 공론화를 통해 만들어진 현대적 의미의 정론은 플라톤이 상정했듯이 분명한 실체를 가진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주어진 특정 시점에 특정 집단이 만들어낸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공론화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참여를 개방함으로써 모든 의견이 ‘고르게’ 공유될 수 있는 기회이자 복수의 주체가 ‘멱살을 잡지 않고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최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양방향 소통 채널이다. 따라서 공론화의 유형과 방법, 절차와 기술은 공론화의 목적과 이슈의 성격, 이해당사자 집단의 속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한다.
이번 공론화의 특징은 그 의제가 yes, no로 환원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것은 국가 에너지 수급 계획과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둘러싸고 찬·반 집단이 수십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가적 난제(wicked problem)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신고리 원전 공론화는 여느 공론화와 다르게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할 필요가 있었고, 공론화위원회 또한 이 두 가지 목적을 명쾌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 편들기’ 아닌 ‘균형’ 이뤄 의미
첫째, 이미 건설 중인 신고리 원전 5, 6호기의 계속 건설과 중단 가운데 어느 것이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공론’인지를 파악함으로써 정부의 정책적 선택을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숙성된 의견을 바탕으로 찬·반을 정확히 표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했고, 공론화위원회가 설계한 최종 조사 설문은 공사 재개와 중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둘째, 이번 공론화의 의제가 첨예한 갈등 사안임에 주목한다면 공론화 이전보다 공론화 이후의 갈등이 더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 선제적 갈등관리가 필요했다. 즉, 중단과 재개를 선택하되 그 선택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조사함으로써 정책과정에서 찬·반을 넘나드는 다양한 정책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찬성과 반대의 분쟁 프로세스를 배분적(대립적) 거래에서 통합적 거래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공론화위원회는 공사 중단과 재개를 넘어 탈원전으로 조사 범위를 확장해 사회적 합의형성과 사회적 수용성 제고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국가 에너지 정책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화가 아니라 전문가 토론이나 국회 표결에 붙이자는 주장이 많다. 차라리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어느 것을 선택해도 결정 이전 보다 결정 이후에 기존 갈등이 완화되거나 해소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건설은 재개하되 탈원전 정책은 유지하라’는 결론이 ‘절묘’했던 것은 대립하고 경쟁하는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하나에 경도된 ‘일방적인 편들기’가 아니라 두 입장과 주장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학습과 숙의에 기초하는 시민참여단의 상식적 판단과 미래 비전이 이 ‘균형’ 잡힌 사고의 시원(始原)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능동적 시민참여에 기초하는 공론화가 대의민주주의 체제와 충돌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그러나 공론화는 어느 경우에도 대의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보완적 기제가 될 뿐이다. 의회와 공론장은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부터 대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대의제의 양대 기둥이었다. 대의제의 공식적인 제도화가 의회라면, 공론장은 비공식적 제도로 남아 정당과 의회의 공식적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다. 현실적으로 공론화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아 모든 것을 공론화로 풀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형성된 공론을 정책으로 전환하며 매번 대표자를 새로 뽑을 수도 없다.
일상적인 문제는 대의제 틀에서 일상적으로 처리하되, 특별히 대의제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특정 이슈는 공론화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프랑스의 국가공공토론위원회가 그렇고, 미국의 수많은 타운홀 미팅이 그러하며, 유럽연합도 예외는 아니다. 공론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론화로 환원되지 않지만, 공론화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안내하는 매우 빠른 길이다. 이참에 공론화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한 축으로 융합될 수 있도록 공론화의 제도적 기반을 튼실히 해야 한다.
은재호│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