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어딘가로 나서고 싶은 계절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유독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싱숭생숭한 마음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떠나고 싶다’와 ‘머물고 싶다’ 사이 그 어디쯤 있는 분들에게 정길연 소설가의 글을 소개합니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가끔은 불쑥 떠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콕 처박혀 지내는 생활 또한 몹시 좋아하고 잘 해낸다. 말하자면 집 밖도 좋고, 집 안은 더 좋다. 어쩌면 유랑보다는 정주 체질에 가깝다고나 할까.
모임에 나가서도 1차니 2차니 장소를 옮겨 다니기보다 붙박이 모양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 뭉개는 쪽이 편하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여장을 풀 때도, 설령 내일 아침 급히 짐을 꾸릴지언정 트렁크 속의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제 위치를 잡아줘야 안정이 된다. 마치 한동안 그곳에 눌러 살 사람처럼.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 ‘떠나고 싶다’와 ‘머물고 싶다’ 사이의 그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낯선 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동시적 소망. 남쪽의 몇몇 섬들과 해안도시들, 내륙의 고즈넉한 산간 마을들, 서쪽의 해 지는 포구들…의 사계절을 자주 떠올렸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면 곳곳을 돌아가며 1년 내지 2년 정도씩 살아보리라, 야무지게 다짐한 적도 있다.
정작 아이가 독립하고 난 뒤에도 나는, 낯선 곳에서의 삶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 꿈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다. 조금씩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꿈. 아마도 실현 가능성보다 실현 의지가 턱없이 부족했을 꿈.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들에 발목 잡혀 사는 인생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리고 이제는 그다지 아쉽지도 않다. 꼭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이 아닌들 어떠랴. 낯선 장소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익숙한 장소가 문득 한없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멀리 오래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면 어떻고, 한나절 외출이면 또 어떠랴. 잠깐 잠깐 바람 쐬고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환기가 된다면.
강추위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물러간 듯싶다. 때맞춰 남쪽에서부터 꽃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노란 복수초가 언 땅을 뚫고, 연분홍빛 매화가 수줍게 몸을 열고, 생강나무 꽃눈은 금세라도 터질 듯 물이 올랐다는 전언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날은 온다.
괜히 집 밖으로 나돌고 싶어 발바닥이 근질거리고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생수와 커피와 김밥 한 줄을 배낭에 채우고 어디 고궁이나 박물관에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떠나고 싶다’와 ‘머물고 싶다’ 사이 그 어디쯤의 대안으로, 언제든 가볍게 달려가곤 하는 도심의 여행지들로.
익숙한 듯 낯선 그곳에서 반나절쯤이라도 머물다 돌아오면 이 싱숭생숭한 봄날, 잠잠히 지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사진=정길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