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슬기롭게 맞는 지혜는 뭘까요? 여기 슬기롭게 늙어가는 부부가 있습니다. 38년 4개월 동안 산림공무원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숲 해설가가 되려하는 산림청장 조연환씨를 소개합니다.
"아기동백꽃이 한창인데, 보고 오셨어요? 이쪽으로 가면 납매(음력 섣달에 꽃이 피는 매화)가 피어서 향기가 아주 좋아요." 산책로에 서서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관람객들의 표정을 읽었나 봅니다. 사진촬영을 하다 말고 그는 스스럼 없이 말을 툭 건넵니다. 그의 허물 없는 태도에,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던 이들이 반색하며 질문을 쏟아냅니다.
"어머, 못봤는데…어디로 가면 되죠?" "그런데 납매가 뭔가요? 처음 듣는데…." 그러자 산책로 방향과 코스별 관람 포인트, 예상 소요시간 등이 익숙한 손짓까지 보태져 그의 입에서 일목요연하게 흘러나옵니다.
그렇다고 음절 하나하나에 참기름 같은 웃음기를 바른, 마치 스튜어디스 같은 반드르르한 친절은 아닙니다. 투박한 말투에 심상(尋常)한 태도가 곁들여진, 더도 덜할 것도 없는 동네 아저씨의 그것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원장이자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 조연환 씨
그런 대수롭지 않음과 예사로움이 주는 편안함 때문일까요. 관람객들도 이것저것 마음 내키는 대로 추가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저 수목원 관리인이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그른 생각은 아닙니다. 그는 공익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의 원장이자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을 맡고 있는 조연환(67)씨 입니다.
그에겐 세상이 알아줄 만한 이력도 있습니다. 19세에 9급 공무원으로 산림청에 들어와 주경야독 끝에 1980년 기술 고시에 합격했고, 국유림관리국장 등을 거쳐 제 25대 산림청장을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A. "집사람과 함께 숲 해설을 할 수 있는 산림교육 전문가 자격증을 땄지요."
Q. 산림청장까지 하셨는데, 숲 해설가 자격증이 굳이 필요한가요.
A. "전문적인 지식도 지식이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도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천리포수목원장 직책도 작년말로 3년 임기를 마쳤거든요. 후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 일단 몸 담고 있을 뿐이지, 제 직장 생활은 그것으로 끝난 셈이지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거기에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됐어요."
새로움 삶에 대한 동기부여 '숲 해설가'
'새로운 삶에 대한 동기부여'라는 말이 묘한 울림으로 귀를 잡아당깁니다. 마른 듯 하면서도 탄탄한 체구에다 희고 깨끗한 낯빛 덕에 젊어 보이는 외양이지만, 칠순을 코 앞에 둔 나이, 손자들 재롱이나 보며 쉬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만도 하건만, '숲 해설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제가 남들처럼 공부할거 다 하고 산림공무원이 된 게 아니거든요. 열아홉 살에 고등학교만 마치고 배우지도 못한 철부지가 말단 산림공무원으로 들어가 산림청장까지 했지요. 그 기간이 자그마치 38년 4개월인데, 그 세월동안 산이 저를 키워준거에요. 말 그대로 산이 월급줘서 나를 먹이고, 산이 나를 학교 보내서 공부시켜주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가르쳐줬지요.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산이 준 은혜를 갚는 일이라 생각해요. 숲 해설가 활동도 그 연장선에 있고요."
조 씨의 호가 '은산(恩山)'이라는 사실이 설명 없이도 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단련해온 생각인지도 조금은 짐작이 됐습니다. 덧붙여 그는 아내 정점순 씨와 함께 '부부 숲 해설가'로 활동하는 소박한 포부도 털어 놓았습니다.
"저는 산림행정가로 일했을 뿐이라 식물에 대해선 집사람보다 잘 몰라요. 집사람은 식물에 원체 관심이 많고 숲 해설에 대해서도 오래전부터 뜻이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그럼 잘됐다.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하면 딱 맞겠다'고 제안했어요. 당신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난 수목원 소개라든지 산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뜻이 맞는 수목원과 협의해서, 가령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쯤 '조연환, 정점순과 함께하는 숲 과의 데이트'이런 걸 하면 좋지 않겠어요?"
그만이 할 수 있는 '숲 해설'이란?
숲 해설 콘셉트를 설명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신바람이 묻어났습니다. 산림청장이니 수목원장이니, 무슨 무슨 이사장이니 하는 거창한 직함을 달아볼 만큼 달아본 사람이 이렇게 소박한 계획을 설명하며 신이 난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인간에게 일이 무엇인지, 왜 일이 필요한지 그리고 힘겹기 만한 노동을 가리켜 왜 종종 '신성하다'는 수식어를 달아주는지 그 의미가 새삼 되새겨졌습니다.
A. "누구나 다 아는 얘기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일이자 자신이 할 수있는 일, 덧붙여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부부에겐 숲 해설이 바로 그런 일 같아요. 두 사람이 할 수 있고, 둘 다 좋아하는 일이면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숲 해설이 있거든요, 우선은 평생 자신이 해온 일에서 제2의 인생을 찾는게 가장 바람직한 것 같아요."
그만이 할 수 있는 숲 해설은 무엇일까요? 궁금한 이는 천리포수목원으로 때 맞춰 나들이를 가볼 일이지만, 참고 하시란 뜻에서 한 대목을 공개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지혜라는게 대부분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나무와 숲, 산의 세계를 보면 그 속에 다 답이 있지요. 세상에서 겪는 경쟁이나 갈등 같은 문제들도 자연을 보면 해답을 발견하게 돼요. 나무는 절대 홀로 자라지 못하거든요. 한 그루의 나무가 잘 자라기까지는 경쟁목이 있어야 하고, 버팀목도 필요하며, 희생목도 있어야 하지요. 제가 하려는 숲 해설은 이게 소나무고 저게 잣나무다, 이런걸 말하려는게 아니에요. 소나무와 잣나무가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가는지를 얘기해보고 싶은거지요."
평생을 배우는 마음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조연환 씨는 뭔가 대단하고 큰 의미를 찾길 원하면서 정작 주변의 소중함을 놓치는 우리를 반성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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