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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

70년대 경제성장 주역은 누구?

지금 우리가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이면엔 배고픔과 아픔을 달래며 치열하게 살았던 여성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살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서울 구로공단의 여성 근로자, 버스 안내양, 파독(派獨) 간호사들은 공동체의식으로 똘똘 뭉쳐 19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뒷바라지한 주역입니다.


1960~70년대


■ 1960~70년대 경제성장을 위한 땀과 눈물의 뒷바라지


1960년대 들어 정부는 수출 지향 정책을 펼쳤지만 실업난과 외화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출산업공업단지 개발조성법이 공포됐고(법률 제1656호, 1964년 9월 14일), 당시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의 허허벌판에 국내 최초의 공업단지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1967년 4월 1일에 제1단지가 완공된 후 1968년에 제2단지, 1973년에 제3단지가 준공됐습니다.


시간이 흘러 2000년 12월 14일 이곳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바뀌며 예전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바꿈했습니다. 구로공단을 이처럼 간단한 연혁으로만 정리하는 것은 거기서 온 젊음을 바친 우리 누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구로공단엔 섬유, 의류, 봉제, 전기전자, 가발, 잡화, 광학 같은 수출 기업들이 대거 입주했었는데, 돈도 학벌도 없는 우리의 누이들은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당시 서울 인구 200만 명의 5%가 넘는 11만여 명이 구로공단에서 일했는데, 근로자의 80%가 여성이었습니다. 실밥과 먼지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작업장에서 그들이 만든 제품은 해외로 불티나게 팔려나가 대한민국 수출액은 1967년의 3억2000만 달러에서 10년 만에 100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1970년 기준으로 월급 2만2000원 중에서 사글세, 식비, 교통비를 빼면 손에 쥐는 돈은 소액이었지만 그렇게 모은 돈을 고향 집으로 보냈습니다. 누이들은 ‘공순이’라고 비하하는 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평 미만의 이른바 ‘벌집’에서 4, 5명이 함께 살았다. 밤엔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학교에 다녔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뜻인 ‘라보때’라는 말도 구로공단에서 생겼습니다. 구로공단은 빈곤 탈출의 출구였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인권을 경시한 우리 사회의 그늘진 흔적이기도 했습니다. 누이들을 주경야독을 하며 꿈을 키운 산업 역군이라고만 미화하기엔 우리가 진 빚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을 내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에 있는 ‘수출의 여인상’에 가보는 것이나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2015)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구로공단 일대의 50년 역사를 아우른 <가리봉오거리>전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4월 24일~7월 12일). 공장과 야학, 그리고 가리봉시장 등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구로공단의 과거 모습은 물론 ‘벌집’ 모형과 누이들의 일기와 편지도 볼 수 있습니다.


■ 여성 근로자·버스 안내양 등, 희생이 있어 오늘이 존재


고속성장의 이면에서 버스 안내양들의 참혹한 삶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라이! 오라이!(영어 ‘all right’의 콩글리시)” 하며 문을 탕탕 치던 안내양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처우, 성적 차별까지 묵묵히 참아내며 승객들을 모셨습니다. 그들은 하루 19시간을 일했고, 식사시간도 따로 없이 20분 휴식시간 내에 해결해야 했습니다. 차비 일부를 슬쩍했다며 이른바 ‘삥땅’ 검사를 받았고, 입금액이 적으면 불시에 소지품 검사도 당했습니다. 표현을 순화해 차장이 아닌 ‘안내양’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신문엔 버스 안내양 기사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여차장의 ‘삥땅’죄냐? 아니냐?”(매일경제 1970년 4월 29일자), “인간 이하 대우받는 버스 안내원”(동아일보 1974년 5월 25일자). “안내양의 하루, 버스에 매달린 고투 25시”(동아일보 1977년 1월 19일자), “승차지옥 이대로 좋은가. 고달픈 안내양”(동아일보 1978년 6월 27일자) 등등. 삥땅 조사는 인권 침해의 소지가 강했습니다. 오죽했으면 1970년 4월 28일 한국노사문제연구협회 주최로 ‘버스 여차장의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까지 열렸을까요.


1960~70년대


신문에서는 “버스 차장 삥땅 심포지움. 혹사가 빚어낸 필요악. 임금 인상이 선결과제”(동아일보 1970년 4월 29일자) 같은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토론자로 참여했던 지학순 주교는 삥땅은 제재받아야 하지만 누구나 일에 대해 공정한 보상과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에 삥땅을 했더라도 죄가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버스회사 사감 생활을 통해 겪은 여차장의 삶을 그린 <기름밥>이 동아일보 논픽션 부문 최우수작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동아일보 1976년 8월 21일자). 하지만 논픽션 고발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랬으니 1978년 당시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버스 안내양 문제를 거론하며 “버스회사 경영진은 안내양을 가족처럼 생각해 따뜻이 보살피고 시민들은 내 딸, 내 누이동생처럼 대해 욕설과 큰소리를 삼가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버스 안내양 문제를 거론한 것은 퍽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알려진 파독 간호사 역시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습니다. 1966년 128명이 처음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땅을 밟은 이후 해마다 1500명가량씩 1977년까지 모두 1만371명이 서독에 파견됐습니다. 간호사들은 외화벌이를 위해 시신 닦기 등 모진 일들을 해냈고 ‘코리안 에인절(Korean Angel : 한국인 천사)’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한국파독연합회는 파독 50주년이 되는 내년에 <파독 간호사 50년사>를 발간하고,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ICKC)는 독일에 ‘딘스라켄 아리랑파크’를 조성해 그들의 공로를 기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구로공단의 여성 근로자, 버스 안내양, 파독 간호사들이 개인적인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낸 밑바탕에는 공동체의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 누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