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입양인의 대부’ 서재송 원장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입양 계속돼 가슴 아프죠”
‘국외 입양인의 대부’로 통하는 서재송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은 “내 아이와 입양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평생 입양인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6·25 전쟁 참전 이후 고아들을 위해 잠시 떠맡았던 일이 평생의 업이 됐습니다.
사진=서재송 원장, 서은미 제공
7월 13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열린 입양 유공자 시상식에서 성 원선시오의 집 서재송(88) 원장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습니다. 서 원장은 1960년부터 아동 복지시설 원장으로서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입양아들의 사진·편지 기록을 보관해 국외 입양인의 가족 찾기에 큰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았어요. 서 원장이 보관 중인 자료는 입양아의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1957~1996년간 1073건에 이릅니다.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서 원장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라며 부끄러워했습니다. 다만 “우리 자식과 입양 보내기 전에 보살폈던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줬다”며 해외 입양아들에 대한 애정을 끝없이 내비쳤습니다.
■ 내 아이와 입양아를 차별하지 않았다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서 원장은 ‘국외 입양인의 대부’로 불립니다. 혼혈아 1000여 명을 포함해 1600명을 입양 보낸 서 원장은 해외 입양을 보낼 때 양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가정 형편과 분위기를 꼼꼼히 따졌습니다.
나이가 어려 입양이 쉬운 이들은 입양기관으로 보내고, 연령이 차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직접 입양시켰습니다. 미국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성탄절과 부활절에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사진과 신상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고, 상대방이 입양을 원한다고 답장이 오면 보내는 식이었습니다.
입양을 대기 중인 아이가 늘어나 “이놈 기저귀 갈면 저놈이 보채고, 그리로 가면 또 이놈이 우는데 매 순간이 전쟁 통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서 원장의 집에는 항상 수십 명의 아이가 함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 원장은 4남 2녀를 키웠습니다. “내 아이와 입양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서 원장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서 원장이 입양인의 대부가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입니다. 국립부산수산대(현 부경대) 학생이던 때 전쟁이 발발해 군에 징집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후 고향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 돌아와 보니 피난민과 부모 없는 아이가 많았습니다. 서 원장은 “1955년에 10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서 원장은 서해 낙도의 슈바이처 최분도(베네딕트 즈웨버) 신부의 부탁을 받고 전쟁고아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또 인천 부평 산곡동 성 원선시오의 집을 맡아 100여 명의 아이를 돌보고 1600여 명의 아이를 미국과 캐나다 등지로 입양 보냈습니다. 미군 기지가 많았던 인천 부평은 혼혈 아동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서 원장이 입양 유공자로 선정된 것은 1980년 초반부터 입양 관련 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이의 이름, 성별, 시설에 온 날짜, 입양일과 같은 기본 정보와 함께 본적, 보호자 연락처 등의 정보를 빼곡히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입양아가 친부모를 찾으려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자료를 꾸준히 보관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부터 미국 등 아이들을 입양 보낸 나라를 직접 찾았다”는 서 원장은 이렇게 직접 찾아다니며 입양아 관련 기록을 수집·정리해 입양아의 뿌리 찾기에 대비했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찾으려는 입양아들이 서 원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서 원장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뿌리를 찾으려는 입양아의 선택 당연한 것
30년 전 지독한 가난 때문에 입양된 쌍둥이 자매가 2001년 한국을 찾아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가난했던 데다 아이를 낳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쌍둥이 자매를 입양 보냈습니다. 자매와 상봉한 아버지는 “30년간 너희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지만 행방을 알 길 없어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왔다”며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울먹였습니다. 당시 쌍둥이 자매와 아버지의 상봉이 가능했던 것은 서 원장이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만남을 주선한 덕분이었습니다. 부모를 만나기 위해 서 원장을 찾는 입양아의 행렬은 그 후 계속됐습니다.
서 원장은 아이들을 해외에 입양 보내는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실 6·25전쟁이 끝나고 1950~1960년대 정도면 입양이 끝날 줄 알았다”며 “1970~1980년대에도 계속 입양 보낸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합니다. 특히 “혼혈 아동과 미혼모 등을 사회가 보살피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전했습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서 원장은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무거운 짐을 이제 사회가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