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성공 한국 남자농구 ‘어게인 2002’
“허재 감독 리더십, 높아진 평균 신장, 살아난 슛 감각 주목”
15년 전인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농구 결승전이 열린 부산 사직체육관.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 야오밍이 이끄는 아시아 최강 중국을 상대로 한국은 경기 종료 25초를 남긴 상황까지 83:90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투혼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연장전 끝에 102:100으로 역전승해 금메달을 목에 건 장면은 한국 스포츠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승부로 기억된다.
그 후로 농구에서 ‘기적’이 재현되지 않았다. 그 사이 야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과 제1·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야구의 중심으로 들어갔고, 축구는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면서 아시아의 맹주로 우뚝 섰지만 농구는 답보 상태였다.
비록 정상에 서진 못했지만 한국 농구가 모처럼 농구 팬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농구인의 가슴속에 꿈틀대던 열정과 자존심을 살려놓았다. 그 무대는 지난 8월 21일 끝난 2017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이었다. 대회 준결승에서 아시아 최강 이란을 맞아 81:87로 분패했지만 1쿼터 20점 차를 잠시 극복하기도 하는 등 이전 대표팀과는 확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줬다. 4쿼터 막판 고비를 넘지 못하고 3·4위전으로 밀려 14년 만의 아시아컵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2년 전 아시아선수권 6위에 그쳤던 부진을 만회했다.
FIBA 랭킹 30위인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랭킹 20위인 뉴질랜드를 꺾었고, 중국을 조별 리그에서 제압한 필리핀을 무려 32점 차로 대파했다. 광복절에 펼쳐진 한일전에서는 일본을 13점 차로 따돌렸다. 이번 대회를 통해 저력을 확인한 한국 농구는 11월부터 시작되는 2019 FIBA 농구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또 중국은 이번 대회 8강에서 호주에 패해 4강에도 들지 못하는 등 내림세가 뚜렷하고, 뉴질랜드와는 얼마든지 해볼 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만큼, 2015년 대회에 이어 2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FIBA는 2015년까지는 지역별 예선 대회를 통해 본선 출전권을 나눠줬으나 2019년부터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예선 제도를 바꿨다. 이에 따라 한국은 예선 A조에서 중국·뉴질랜드·홍콩과 함께 2018년 7월까지 홈과 원정을 한 번씩 오가며 경기를 치른다. 대표팀이 안방에서 선전을 보인다면 침체된 농구 인기의 부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대교체의 밑천 ‘2cm’와 ‘스피드’
이번 대표팀 가드는 김선형(SK)·허웅(상무)·박찬희(전자랜드)·최준용(SK), 포워드는 이정현(KCC)·임동섭(상무)·전준범(모비스)·양홍석(중앙대)으로 구성됐다. 또 센터는 이승현(상무), 김종규(LG), 이종현(모비스), 오세근(KGC인삼공사)이 선발됐다. 전체적으로 장신화와 세대교체에 초점을 맞춘 선발이 두드러졌다. 대표팀의 평균 신장은 약 195.8cm로, 직전 대만에서 열렸던 윌리엄존스컵 출전 명단보다 2cm 정도 더 크다. 180cm대 선수는 김선형과 허웅 둘뿐이고, 내·외곽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2m의 최준용을 톱에 세워 상대 가드를 압박하는 수비 전술 등 지략 싸움으로 상대 벤치를 압도했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평균 득점 89.7점으로 호주(95.2점)에 이어 2위에 올랐고, 3점 슛 성공률 42.3%와 경기당 3점 슛 성공 10.5개로 모두 2위를 기록했다. 어시스트는 27.2개로 16개 참가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농구는 그동안 신장 열세를 의식해 일부러 템포를 늦추고 세트 플레이 위주로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은 달랐다. 반대로 한 템포 빠른 패스 플레이에 이어 기회가 나면 공격 제한 시간과 상관없이 과감하게 3점 슛을 던졌다. 상대 수비가 자리 잡기 전에 슛을 던지다 보니 오히려 성공률이 높아졌다. FIBA도 누리집을 통해 “한국 농구는 마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농구를 보는 것 같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사진=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국제용 슈터’를 발견했다는 것도 큰 수확이다. 허재 감독의 아들인 허웅은 이번 대회에서 경기당 평균 2.3개의 3점 슛을 성공시켰다. 특히 뉴질랜드와의 3·4위전에서는 혼자 3점 슛 5개를 넣어 팀 내 최다인 20점을 책임졌다. 과거 아버지의 전성기 시절 모습을 코트에서 그대로 보여줬다. 전준범은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서 3점 슛 5개 등 20점을 얻었다. 두 선수 모두 20대 중반의 젊은 선수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더욱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한국은 양동근(모비스), 김주성(동부), 조성민(LG) 등 오랜 시간 대표팀을 이끌었던 베테랑들 대신 30세 이하(평균 26세) 선수들로 꾸렸는데 ‘젊은 피’의 효과는 탁월했다. 이번 대회 베스트 5에 선정된 오세근을 중심으로 젊은 빅맨들은 신장의 열세를 적극적인 몸싸움으로 만회했다. 197cm인 이승현은 이란과의 준결승전에서 218cm의 미국 프로농구(NBA) 출신 장신 센터 하메드 하다디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7점으로 묶었다. 한국 농구가 국제무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해법을 보여준 대표적인 장면이었다.
김동광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가드나 포워드진의 평균 신장이 커지면서 외국 장신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됐다”면서 “전체적으로 세대교체가 잘 이뤄진 데다 젊은 선수들도 성장했다. 실현 가능성이 관건이겠지만 귀화 선수까지 가세한다면 대표팀의 경쟁력은 더욱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재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은 지난달 초 원주종합체육관에서 진행된 훈련을 앞두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소집 첫날 15명 중 7명이 부상이더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허재호’를 향한 주위의 기대치도 낮아졌다. 하지만 한숨이 환호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시아컵 실전에 들어가자 경쾌한 몸놀림으로 코트를 휘젓고 한국 특유의 외곽 슛도 위치를 가리지 않고 퍼부었다. 남자 프로농구 모비스의 사령탑이자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만수’ 유재학 감독은 대표팀 엔트리를 놓고 허 감독과 점심도 거른 채 네 시간에 걸쳐 토론하고 조언도 건네는 등 지원사격을 했다.
▶지지율 반등한 ‘농구 대통령’의 집권 1기
(사진=한국 대표팀 허재 감독, 대한농구협회 제공)
허 감독은 ‘농구 대통령’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한국 농구의 전설이자, 감독으로도 전주 KCC를 두 번이나 정상에 올려놓은 명장이지만 대표팀 감독으로는 아쉬움이 컸다. 지난 2009년 톈진 대회와 2011년 우한 대회 때도 대표팀을 지휘했는데, 당시에는 프로농구 KCC 사령탑을 역임하면서 리그 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대표팀 감독을 임시 겸임하는 구조였다. 2009년 톈진 대회에서 허 감독이 이끈 한국팀은 레바논과 대만 등에 잇달아 패하며 대회 역사상 최악의 성적인 7위에 그쳐 그야말로 ‘톈진 참사’였다. 한국 농구가 아시아 무대에서 3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허 감독의 화려한 농구 인생을 통틀어서도 가장 참담한 순간이었다. 허 감독은 2년 뒤 우한 대회에서 다시 한 번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설욕을 노렸지만 준결승에서 중국에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나 지난해 6월 허 감독은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복귀한 이후 실패를 거울삼아 차근차근 팀을 바꿔나갔다. 2016·2017 윌리엄존스컵, 2017 동아시아 대회 등을 통해 경험을 쌓으며 대표팀을 일궈왔다. 최근 야구에서도 선동열 감독이 선임됐듯이 전임감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현역 시절의 ‘열혈남아’ 이미지도 그렇고 경기 도중 작전 타임 때 비치는 모습이 호랑이 같지만 실제로 허 감독은 선수들을 무한 배려하는 ‘형님’ 스타일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세대교체의 기조에 걸맞게 어린 선수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친근한 카리스마’로 변모했다. ‘성공적인 세대교체’였다는 평가에 대해 허 감독은 “나이 어린 선수 위주로 보강했는데 전준범, 허웅, 최준용이 생각보다 잘해줬다”고 말했다.
성환희 | 한국일보 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