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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황금개띠 3인의 '2018 희망 인터뷰'

황금개띠 3인 2018 희망 인터뷰
“잡초 같던 우리 인생, 젖은 낙엽 정신으로 희망 갖고 산다”

 

6·25전쟁 직후 ‘베이비붐’ 세대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1958년생 앞에는 파란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가난, 반공, 무조건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 유신(維新), ‘뺑뺑이’로 알려진 첫 번째 무시험 고교 입학, 역대 최고의 대학입시 경쟁률, 5공과 6월항쟁, 그리고 IMF 외환위기와 명퇴·정리해고…. 경쟁과 굴곡 끝에 ‘잡초’처럼 살아남은 그들은 올해 환갑을 맞았습니다. 개띠 해가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데, 6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황금개띠 해를 다시 맞은 58년 개띠는 올해의 주인공입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산전수전, 아니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은 세대 58년 개띠들의 새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위클리 공감 홈페이지에서 기사 원문 자세히 보기

 


 

 

방송인 임백천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덕수초등학교 시절, 임백천은 1600여 명의 개띠 동기들과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는 “한 반에 70명씩 2부제 수업을 했다”며 “학생이 너무 많다 보니 수업 빼먹고 영화 보러 다녀도 선생님께 들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땡땡이’의 명수였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을 듣고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5·16군사정변을 맞고 고등학교 입시 때는 소위 ‘뺑뺑이’(고교 평준화)로 제도가 바뀌면서 격동의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는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살아내기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전쟁 세대라 생활을 생존의 개념으로 이해했고, 우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죠. 어릴 때 친구들이 많아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큰 힘이 됐어요. 그게 58년 개띠들의 장점이자 특징이에요. 그땐 사는 형편이 다 비슷해서 아버지가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자영업자이든 전혀 상관없었어요. ‘너희 아파트 몇 평이냐’ 같은 얘기는 아예 없었고, 친구가 마음에 들어 대화가 통하면 그때부턴 부모가 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임백천은 대학 1년 때인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입상하며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수상을 계기로 각종 프로그램의 MC를 도맡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대학 2년 때 ‘젊음의 행진’ 전신인 MBC ‘젊음이 있는 곳에’ 진행을 맡아 국내 최초 TV MC로 기록되었습니다. 튀지 않고 신뢰성 있는 진행으로 각 방송사가 앞다퉈 섭외하는 인물이 됐고, 이 중 한 방송사는 ‘특채’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그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인기가 치솟을 때 방송의 불안한 미래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전공인 건축을 살려 공영토건 건축기사로 5년간 현장을 누볐습니다.


임백천은 “58년 개띠의 특징은 어떻게든 버티는 것, 저는 그걸 ‘젖은 낙엽 정신’이라고 불러요. 약간 살얼음이 낀 늦가을 낙엽은 쉽게 쓸리지 않거든요. 악착같이 땅에 붙어서 살아남지요”라고 말했습니다. “58년 개띠 세대는 군사정변부터 IMF 외환위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매번 겪었다”며 “지금처럼 자기 홍보를 하면 되레 눈총받던 시대였고, 그래서 베이비붐 세대는 인내하고 나를 고집하지 않는 스타일을 공통점으로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1990년대 지금의 유재석처럼 ‘국민 MC’로 통했던 가수 겸 MC 임백천.
그는 올해 7년째 이어가는 KBS 2라디오 ‘라디오 7080’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라디오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최장수 프로그램이에요. 이 또한 58년 개띠의 젖은 낙엽 정신을 보여준 최고의 모델”이라면서 웃었습니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 중 1958년 출생자가 가장 많아 제일 목소리가 큰 세대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론 안 그래요.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 제목처럼 58년 개띠는 억울하거나 기뻐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소리치지 않아요. 많이 참는 세대”라고 했다. 위로는 선배나 부모를 모시고, 아래 후배들은 챙기고, 그렇다고 좋은 세대라는 말은 듣지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 채 ‘낀’ 세대 로 살았습니다. 그는 “건국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는 젊은 후배들도 ‘헬조선’을 외치며 소리만 내서는 더욱 불편한 현실이 될 것”이라며 “21세기까지 살아남은 58년 개띠들도 여생이 편하려면 천지개벽해가는 21세기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적응해야만 한다”고 쓴소리를 남겼습니다. 

 

 

 

정철수(가명)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찾았으면 좋겠다”


77학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 패스트푸드 계열사 대표까지 지낸 58년 개띠 정철수 씨(가명). 그의 스토리는 58년 개띠의 인생과 딱 들어맞습니다. 그가 꼽는 첫 인생의 변곡점은 고교 입학시험이 사라진 것이었다. 소위 ‘뺑뺑이’로 진학하는 바람에 명문고 서열을 벗어나 기가 죽지 않았고, 직업을 구할 때도 고교 서열 같은 것 상관없이 덤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점이 57년생과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회고합니다.


58년 개띠들에게 박정희 대통령 서거는 또 하나의 인생 변곡점이었습니다. 정 씨는 부마항쟁, 12·12군사반란, 5·18민주화운동을 군인의 신분으로 이 모든 사건을 겪었습니다. 동시대를 사는 젊은이로서 군대에 있던 이들과 밖에서 데모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정 씨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58년 개띠들은 어느 쪽이든 사회 현상을 남 일 보듯 넘길 수 없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정 씨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경쟁은 있었지만, 취직만 하면 회사가 금방 성장하는 바람에 일하는 데 신바람이 났다”고 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해도 70~80%는 성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살던 개띠들에게 IMF 외환위기는 ‘복날’이 다가온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큰 보상은 못 받아도 위험한 일은 없을 거란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 씨 부부는 젊었을 때 4대가 함께 방 세 개짜리 전셋집에 살았습니다. 아이와 나란히 누울 공간도 없어 아이를 머리맡에 두고 함께 잤습니다. 그래도 요즘 결혼을 두려워하는 젊은 세대와 달리 과감하게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퇴사할 때 회사는 ‘내가 31년간 땀 흘린 회사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매정하게 정 씨에게 사직통고를 했습니다. 퇴직하고 보니 온갖 자격증을 따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회사 일에 매달려 살아온 정 씨에겐 운전면허증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 씨는 “그때 마침 부모님이 중병으로 교대로 입원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지냈다”며 “아내와 함께할 시간이 없어 미안했지만, 다행히 많이 이해를 해줬다”고 했습니다.


정 씨는 그래도 돌아보니 직장 생활에서 가장 큰 가치는 동료애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 성과에 매달리다 보니 ‘사람’이 안 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은퇴 후 진급할 이유도 없고 승진할 일도 없으니 남을 도와가면서 일하는 것을 즐깁니다. 정 씨는 2017년 2월부터 지자체에서 중·장년층에게 사회공헌일자리를 연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 씨는 올해 환갑을 맞는 58년생 개띠 친구들에게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한비야 
“‘1그램의 용기’를 드립니다”


‘58년 개띠’ 한비야는 ‘바람의 딸’이라는 호칭보다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2007년 그가 세운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에서 24명의 정규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2017까지 50만 명의 학생을 교육했고, 100% 재능 기부로 이 학교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2015년 출간한 에세이집 〈1그램의 용기〉 인세 수입 중 2억 원을 기부했을 만큼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한비야 교장은 “지금 세계는 지구촌이 아니라 유리로 된 지구집”이라며 “지구 가족의 어려움을 함께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세계 시민으로 만드는 게 우리 학교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한 교장은 “58년 개띠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됐다”며 “피원조국 대한민국이 원조국으로 국제무대에 섰을 때,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58년 개띠 여자로 받은 프리미엄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한비야는 “콩나물 교실에서 초등학교를 세 차례나 옮겨가며 공부했고,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남동생의 대학 졸업을 위해 6년 동안 고졸 여성으로 세상의 온갖 ‘갑질’을 경험해야만 했다”며 “당시엔 그것이 희생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냈지만, 지금의 인도적 지원 임무에 얼마나 값진 경험이 됐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한 교장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 세계 일주를 떠났을 때 나이가 서른셋(1991년)이었고, 오지 여행가로 경력이 쌓일 즈음 국제 NGO 월드비전에 들어가 마흔둘(2000년)의 나이에 국제구호 전문가로 전 세계 재난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한비야는 다시 떠났다. 쉰둘(2010년)에 유학을 떠나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 스쿨에서 인도적 지원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한 한비야는 ‘선생’, ‘박사 학생’, ‘월드비전 인도지원팀’의 1인 3역을 소화했습니다. 2012년 1학기부터 이화여대에서 국제구호개발협력 강의를 맡아 현장과 유학을 통해 배운 지식을 나누며 ‘한비야 키즈’를 배출하고 있다. 2014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올해 가을 졸업을 목표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여름·겨울 방학에는 시리아 난민촌 등 긴급한 구호 현장에서 일하며 시의적절하게 도울 방법을 고민합니다.


한비야는 58년 개띠 여성을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특유한 에너지도 그곳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여행 에세이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시작으로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의 베스트셀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한비야는 에세이 〈1그램의 용기〉에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담았습니다.


“책 제목인 ‘1그램의 용기’는 평소 제가 자주 하는 말이에요. 그 작은 용기를 내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보태주고 싶었어요. 작은 용기들이 삶을 바꿉니다. 저 역시 힘이 떨어지고 지칠 때가 있는데 다시 저를 세워준 것이 작은 용기들이었어요.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우리 58년 개띠 동기들에게 ‘1그램의 용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지만, 한비야의 수첩은 하고 싶은 일들로 가득합니다. 앞으로 10년은 구호 현장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이후에는 숲 해설가로 나설 예정입니다. 구호 현장을 떠나 시간이 허락되면 전업 작가로 나서 가슴을 울리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한비야 교장은 “묘비명은 ‘몽땅 다 쓰고 가다’로 이미 정해두었다”며 “새해엔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이 할 일이 없을 만큼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