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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자원봉사로 세상의 소금이 된 3인

새해부터 사회 곳곳에서 훈훈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뜨거웠던 봉사의 바람이 올 한 해에도 식지않고 계속될 예정입니다. 여러분은 자원봉사로 세상의 소금이 된 3인을 아시나요?

 


사회 곳곳에서 나눔을 실천해온 사람들을 국민이 직접 추천해 포상하는 '국민추천포상제'. 2014년 제 4기를 맞아 국민훈장 4명, 국민포장 7명, 대통령표창 16명, 국무총리표창 13명 등 모두 40명이 상을 받았어요. 여기에는 위안부 피해자, 환경미화원,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눔을 실천한 봉사자들이 포함되어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우리 사회에 따뜻한 등불이 되어준 3명의 자원봉사자 이야기를 소개해요.

    목소리 천사 황임숙 씨

 

목소리 천사 황임숙씨


시각장애인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한 여성에게로 다가갑니다. “혹시… 황임숙 씨 아니에요? 어머, 맞아요? <소설 동의보감>끝내줬어요~.” 25년간 시각장애인용 도서 녹음 봉사를 해온 황임숙(77) 씨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연예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점자책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녹음도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매체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녹음도서를 통해 어둠 저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 세계로 25년간 안내해온 이가 바로 황임숙 씨입니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에 소장된 황임숙표 녹음도서는 모두 976권, 복지관 전체 녹음도서중 7.5%를 차지하는 많은 양입니다.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황임숙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로 25년간 시각장애인의 친구가 되어왔습니다.

    1989년 처음 녹음 봉사를 시작

그가 처음 녹음 봉사를 시작한 건 1989년, 작은딸을 유학 보내고 나서 경미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였습니다. 평소 그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조카는 그에게 녹음 봉사를 권했습니다. 호기심에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방문했을때만 해도 봉사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복지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10명 정도 되는 장애인들을 만났어요. 당뇨로 실명한 사람, 시너가 눈에 들어가 실명한 사람…. 다양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있더군요. 그분들은 약시만 되어도 넘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때 ‘나는 이렇게 감사할 게 많았는데 그동안 모르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에서 뭔가가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부터 감사하는 생활이 시작됐죠.”

녹음도서 봉사


그는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저녁 6시까지 책을 읽는 생활을 시작했어요. 당시 복지관 녹음실 시설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느라 아이스팩을 발에 대야 했고, 겨울에는 담요와 전기방석이 필수였어요. 그러나 봉사를 하면서 잃었던 밥맛을 찾았고, 누렇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녹음 봉사가 보약이었습니다. “녹음 봉사를 시작한 그때가 제2 인생의 출발점이었어요.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의 목소리로 녹음한 책을 잘 읽었다고 격려해주시고 고마워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오히려 제가 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죠. 어찌 보면 조금 도와드리러 갔다가더 많은 것을 받은 시간들이었어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봉사를 다니는 그를 보고 남편은 “그럴힘이 있으면 차라리 돈을 벌지”라며 못마땅해했지만, 그가 점차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큰 후원자가 됐습니다. “나중에는 남편도, 아이들도 저를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아이들도 엄마 목소리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데 복지관에 안가면 안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25년 한결같은 봉사 어떤 고비도 꺾지못해

황임숙 씨만큼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녹음 봉사를 한 사람은 드뭅니다. 한달에 신간 30권중7, 8권을 읽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 신간을 시각장애인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죠. 책을 하도 읽으니 좋은 책을 고르는 감각도 생겼습니다.

“봉사의 첫째 요건은 사명감이에요. 그리고 책을 좋아해야 하죠. 저는 시각장애인들이 제 오빠다, 딸이다,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요. 녹음실이 작아서 답답하다고 그만두는 봉사자들도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녹음실만 들어가면 잡념이 없어졌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복지관까지 걸어가면서도, 떨어지는 낙엽 하나, 푸른 이파리 하나를 보면서도 매일 감사 기도를 합니다.”

25년간 한결같이 봉사를 해왔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이 많아지면서 좋은 책을 녹음할 기회가 예전보다 적어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른 봉사를 해볼까?’하며 그만둘 생각도 해봤답니다. 그러던 중 국민추천포상 시상식에서 국민포장을 받게됐고, 시상식과 만찬에서 자신보다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저보다 열 살이나 많지만 현역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만났어요. 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박근혜 대통령도 봉사자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려달라’고 하셨어요. 이제 그만 은퇴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제가 읽을 책은 여전히 많습니다. 제 소원은 오늘까지 녹음하고, 내일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국내 최장기 기부자 이상차 씨

 

국내 최장기 기부자 이상차 씨


“평생 나쁜 짓은 안 했으니 떳떳하죠. 그걸 나라에서 인정한 것같아요. 떳떳하게 살아온 것, 그게 재산이죠.” 제4기 국민추천포상 시상식에서 국민포장을 받은 이상차(73) 씨의 수상 소감입니다. 그의 소감은 곧은 성품만큼이나 간결했습니다.그는 ‘봉사’라는 단어조차 어색했을 1970년부터 남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시작하기보다 꾸준히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 봉사죠.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3년을 제외하고는 지난 45년 동안 늘 같은 모습으로 도움의 손길을 전해왔습니다. ‘국내 최장기 기부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그는 우리나라 봉사의 산 역사나 다름없습니다. 경제상황이나 트렌드가 바뀌듯 봉사의 형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왔습니다.

    45년 동안 봉사의 형태도 흐름에 따라 변해


처음 그는 헌옷을 깨끗이 세탁해 소년촌(고아원)에 가져다주었어요. 누구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양말, 치약, 칫솔 같은 생필품을 건넸어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을 선물했고, 당시 인기 먹을거리였던 라면을 여러 박스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노인을 위한 봉사도 했어요. 1970년부터 매년 경로당 노인들에게 여름에 삼계탕, 겨울에는 육개장을 대접했습니다. 그가 비용을 대면 부녀회원들이음식을 만들어서 경로잔치를 열었습니다. 경로잔치는 20년 동안 이어졌어요.

“노인잔치를 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어느 당에서 왔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정도로 일반인 봉사가 낯설 때였어요.” 1990년대에 접어들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먹고살 만해졌으니, 경로잔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쌀’이었습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매달 10kg씩 쌀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쌀과 함께 생필품도 보냈으며, 겨울에는 내의와 연탄도 보냈어요. 그가 후원하는 노인은 20명에서 시작해 지금은 70~80명이 됩니다. 한 달에 나가는 쌀값만 200만 원이에요. 2011년부터는 캄보디아 우물 파기 사업도 후원합니다. 우물 하나 파는 데 70만 원이 들어갑니다.

2013년부터는 홀몸노인들에게 쌀뿐 아니라 밑반찬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자원봉사자 5명이 모여 반찬 20인 분을 만들어 배달하는 방식입니다.

    어려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됐고, 기부로 그 결심을 실천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를 북한에 두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일을 하게 되자 외할머니에게 맡겨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한 공기를 세 번씩 나눠 먹는 것이 일상이었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수면제를 먹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약국에서 수면제를 한꺼번에 여러 개 살 수 없었기에 서대문에서 마포까지 걸어가면서 약국 하나 발견하면 수면제 하나 사고 울고, 다른 약국에서 수면제 하나 사고 울고…. 제게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는 17세가 됐을 때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세에는 마포에 작은 구두공장을 차렸으며, 명동에 위치한 백화점에 구두 가게를 열었어요. 이어 남대문으로 가게를 옮겨 1995년부터는 구두 도매상을 운영했습니다.

돈을 벌기 시작하자 어려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됐고 기부로 그 결심을 실천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봉사가 오히려 자신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잘된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다시 찾아오기도 합니다. 더 없이 큰 기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학생들은 잘되면 저를 찾아오지만, 노인들은 때가 되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돼요. 노인 봉사는 허무하죠. 그래도 노인 봉사를 으뜸 봉사라고 합니다. 정말 아무 욕심 없이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가 열심히 하고 있는 봉사 중 ‘생일 케이크 봉사’가 있습니다. 생일을 맞은 홀몸노인에게 생일 케이크를 배달하는 봉사인데,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선물도 증정합니다. 이 따뜻한 생일 파티에는 인근 학원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동네 떡집에서 떡을 선뜻 내놓기도 합니다. 생일 케이크 봉사는 쌀과 반찬, 옷을 가져다줄 때와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해요.

 

노인 생일잔치


“생일 파티는 엔도르핀이 많이 도는 봉사예요. 생일 축하를 받는 사람들은‘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행복해
하죠. 예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어요. 제가 매년 그분의 어머니께 생일 케이크를 갖다 드렸는데 그렇게 행복해하실 수 없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생각이 나더랍니다.”

 

    봉사는 제 2의 직업


그는 “봉사를 하다 보면 자식이 잘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보고 배웠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한 큰 딸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들은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기부에 아낌이 없습니다. 아내 역시 조선족 사람들이 자립하는 데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제 사업에서 손을 뗀 그에게 봉사는 제2의 직업이 됐습니다. 매달 기부하는 것에서 벗어나 여러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그들과 함께 더 큰 사랑을 만들어 가고있습니다. ‘왼손이 하는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옛말입니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봉사를 장려하고 홍보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겨울에만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일 년 열두 달 언제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요. 봉사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하죠. 기부문화를 전파해야 사회가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커지면 범죄자가 줄어들어요. 범죄가 줄면 사회가 밝아지죠.”

그는 마지막으로, 봉사에 뜻은 있지만 돈이 없거나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했습니다. “요즘에는 돈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투자하는 봉사가 더 필요해요. 직접 반찬을 만들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것은 물론, 아픈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것도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먹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보세요!”

 

    환경미화원 이흥배 씨

 

환경미화원 이홍배 씨


2014년 국민추천포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은 환경미화원 이흥배(44) 씨. 그가 봉사의 삶에 입문한 건 ‘장애인 야학교사 모집’전단지를 보고 나서입니다.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체육관 합기도 사범을 하고 있던 그는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껴 장애인 야학교사에 지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봉사에 큰 뜻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학생이었던 30대 장애인 여성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우연히 들른 한강 둔치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한강을 본 그 여성이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분 말씀이 ‘TV에서만 봐오던 한강을 직접 보니까 너무좋다’는 거예요. 그 순간 ‘이분들에게는 이런 일상조차 소중하구
나’하는 충격을 받았고,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도움을 줄 수 있구나’하는 걸 깨달았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장애인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나들이 봉사’는 올해로 24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야학교사, 장애인 아동 도우미 등으로 봉사하며 알게 된 장애인들이 한두 명씩 합류해 지금은 나들이 멤버가 9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그는 10년 전 전셋집을 마련해 4명의 중증장애인과 동고동락하는 사랑방 ‘등대지기’를 마련했습니다. 모두 20년 이상 봉사활동으로 알고 지낸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식구인 이윤호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다가 만났습니다.

 

    중증장애인과 동고동락하는 사랑방 '등대지기'마련

 

이뿐 아닙니다. 그는 10년 전 전셋집을 마련해 4명의 중증장애인과 동고동락하는 사랑방 ‘등대지기’를 마련했습니다. 모두 20년 이상 봉사활동으로 알고 지낸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식구인 이윤호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다가 만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는데, 그걸 알게 된 이흥배 씨가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이윤호 씨는 시설에서 받았던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그곳을 나온 후 다시는 다른 시설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흥배 씨가 사랑방을 마련한 이유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알고 지냈던 중풍환자 하 씨, 고향 농가에서 일꾼으로 고생하던 지적장애인 김 씨, 뇌병변장애인 황 씨 등이 그가 직접 돌보고있는 등대지기 식구들입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방문해 끼니와 목욕, 잠자리 등을 챙깁니다.

 

그의 봉사는 장애인을 돌보는것에 그치지 않고, ‘ 나들이’라는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에게 나들이는 꿈만 같은 일입니다. “전국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어요. 물론 몸이 불편한 분들과 움직이는 일은 굉장히 어렵죠. 대신 쉬엄쉬엄 다니고 있어요. 가다가 차가 막히거나 힘들면, 어디든 내려서 밥 해먹고 쉬었다 가요.쉬는 곳이 여행지죠. 사람 많은 주말은 피해서 다니고요.”

 

이 모든 일들은 정부나 단체 지원 하나 없이 모두 이흥배 씨가 사비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폐지를 주워 마련한 돈에 대출을 더 받아 사랑방을 마련했고, 지금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사랑방과 나들이 봉사를 위해 서너 가지 일을 더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폐지를 줍고, 철거하는 일에도 참여하며, 점포 없이 가구 영업을 다니기도 합니다. 사랑방 식구들을 돌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새벽이나 야간 일을 주로 해왔지만, 4년 전부터는 안정적인 환경미화원 일을 하면서 여러 일을 겸업하고 있습니다.

등대지기 식구들과 이홍배 씨


“방송에서 보면 장애인 단체들이 어렵다고 나오지만, 사실 저희가 먹고사는 데에는 그리 많은 돈이 들어가지는 않아요.다만 돈이 더 있다면 (등대지기) 식구들과 나들이를 한 번이라도 더 갈 수 있겠죠.”

 

    두 아이를 둔 가장. 장애인 봉사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개의치 않아

 

이흥배 씨는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 두 아이를 둔 가장입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봉사를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때로는 함께 봉사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적극적으로 돕는 편은 아니지만, 식사 준비를 할 때면 등대지기 식구들이 먹을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만들어놓습니다.

한창 교육비가 많이 들어갈 시기에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장애인 봉사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내가 술 먹고 노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맞는 이야기더라고요. 만일 지나가는 할머니의 물건을 들어드린다면, 그건 할머니를 위한 일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저를 위해 하는 일이죠.”

이흥배 씨는 앞으로도 지금의 식구들을 잘 돌볼 생각입니다. 법인으로 전환하거나 식구(장애인)를 늘려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외부 돈을 받기 시작하면 실적을 내거나 돈을 더 끌어오기 위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게 이유입니다. 대신 오래된 버스 한 대를 구입하면서 새로운 봉사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습니다.

“화장실이 딸린 버스를 구입했어요.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자주 운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식구들이 편안하게 탈 수있는 버스예요. 앞으로 버스를 이용해서 홀몸어르신들의 고향 방문을 돕고 싶어요. 한번은 어떤 노인을 부모님 산소에 데려다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분을 업고 수풀을 헤치고 걸어가서야 산소에 도착할 수 있었죠. 그 노인이 한 시간 이상 울더라고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은 얼마나 고향에 가보고 싶겠어요. 고향이 지방인 분들을 대상으로 고향 방문 봉사를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지금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겠죠.”

봉사는 내 생활이 풍요롭기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게 아니라 내 생활이 힘들수록 주변을 둘러보며 함께 힘을 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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