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축구팬들은 박지성(34·은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했습니다. 그가 골을 넣으면 함께 기뻐했고, 그가 그라운드에 쓰러지면 가슴 아파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었던 박지성은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입성했습니다. 한국 축구의 자긍심이자 대들보였고 상징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과거'가 박지성(34·은퇴)이라면, '현재'는 손흥민(23·토트넘 핫스퍼)입니다. 손흥민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대세이자 아이콘이면서 2015년 가장 '핫(hot)'한 선수입니다.
2015년 여름,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으며 EPL 무대를 밟아 한국인 1호 프리미어리거가 됐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2015년 여름, 손흥민도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을 떠나 EPL 빅클럽 토트넘에 입단했습니다. '한국인 13호 프리미어리거'인 손흥민은 10년 전 박지성이 EPL로 갈 때의 이적료 400만 파운드의 5배가 넘는 2200만 파운드(한화 약 4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했습니다. 2200만 파운드는 아시아 선수 역대 최고 이적료입니다.
손흥민은 '손세이셔널'이라는 별명 그대로 초반부터 맹활약을 펼치며 EPL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9월 20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화이트 하트레인에서 열린 2015~2016 시즌 EPL 6라운드 크리스털 팰리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출전해 후반 23분 왼발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9월 13일 선덜랜드와의 원정경기를 통해 잉글랜드 무대 데뷔전을 치렀던 그는 2경기 만에 리그 첫 골을 뽑아내며 '역대 EPL 한국 선수 최소경기(2게임) 데뷔골'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이에 앞서 18일 홈에서 열린 카라바크(아제르바이잔)와의 2015~2016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조별리그 J조 1차전에선 멀티 골을 작렬시키며 홈 팬들에게 강렬한 첫 인상을 심었습니다. 손흥민은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해 팀의 3-1 역전승에 앞장섰습니다. 새 팀으로 이적한 후 3게임에 출장해 3골을 넣었고, 손흥민 합류 이전까지 이번 시즌 마수걸이 승수 쌓기에 실패했던 토트넘은 3연승으로 신바람을 냈습니다.
토트넘이 그를 영입했을 때 현지에서는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용'이라는 비아냥이 흘러나왔었습니다. 더구나 토트넘이 최근 공을 들인 거액 선수 영입이 거듭 실패로 끝나면서 '이번에도 헛돈을 쓴 게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손흥민이 이런 시선을 걷어내는 데는 3경기면 충분했습니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토트넘 감독은 "손흥민은 우리 팀의 새 영웅이 될 수 있다. 그가 있어 매우 행복하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동북고 시절이던 2008년, 대한축구협회의 우수선수 해외 유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로 유학을 떠난 손흥민은 함부르크 유스팀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친 뒤 2010년 성인팀으로 스카우트됐고,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5년간 성공 가도를 질주했습니다.
데뷔 초부터 강렬했습니다. 2010년 10월 30일(한국시간) 쾰른전에 처음 나서 1-1로 맞선 전반 24분 역전골로 데뷔골을 장식하면서 유럽 축구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단숨에 함부르크의 주축 선수로 떠오른 손흥민은 2012~2013 시즌 33경기에서 12골, 2도움을 올리는 등 거침없이 성장했습니다.
2013~2014시즌을 앞두고 분데스리가 명문 중 한 팀인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습니다. 레버쿠젠은 차범근(62)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현역 시절 몸담았던 팀입니다. 손흥민은 레버쿠젠에서 뛴 두 시즌(2013~2014, 2014~2015) 동안 주축 공격수로 활약했습니다. 리그 61경기에 출전해 21골(2013~2014 시즌 10골, 2014~2015 시즌 11골)을 넣었고, 함부르크 시절인 2012~2013 시즌까지 포함해 3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수로 발돋움했습니다. 분데스리가 통산기록은 135경기 출전에 41골, 6도움. 또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에서 통산 8경기 출장해 3골, 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올여름 유럽 축구 이적시장은 어느 해보다 뜨거웠습니다. 토트넘이 손흥민을 영입하기 위해 레버쿠젠에 지급한 이적료는 2200만 파운드. 그동안 프리미어리그를 밟은 12명의 한국인 선수 중 이적료가 1000만 파운드를 넘어간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박지성이 10년 전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갈 때 이적료가 400만 파운드였고, 기성용(스완지시티)이 지난 2012년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스완지시티로 이적할 때 750만 파운드였습니다. 유럽 전체로 눈을 돌렸을 때도 2200만 파운드는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 이적료 신기록입니다.
이적료 2200만 파운드는 2015년 여름 프리미어리그 9위에 해당합니다. 이적 전문 사이트 '트란스퍼마크트'에 따르면 손흥민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 1부 리그 등을 모두 합친 유럽 시장 전체 이적료 순위에서도 더글라스 코스타(바이에른 뮌헨) 카를로스 바카(AC밀란) 등과 함께 공동 16위에 랭크됐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한 뒤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톱 클래스' 선수로 인정받았고, 그는 빼어난 실력으로 그 가치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명지대 재학 시절 당시 시드니올림픽팀 사령탑이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맨발의 무명'에서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한 것과 달리 손흥민은 일찌감치 해외로 건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축구 본고장 유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EPL에서 뛰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쳐왔고, 마침내 꿈의 무대를 밟았습니다.
박지성은 24세에 맨유에 입단한 뒤 33세이던 지난해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손흥민은 이제 23세에 불과합니다. 축구 팬들은 일찍 은퇴한 박지성의 아쉬움을 손흥민으로 달래면서, 손흥민이 앞으로 박지성을 넘어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최근 안타까운 부상 소식이 전해져지만 쾌유를 빌며 손흥민의 눈부신 활약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