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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정보

한국전쟁 64주년, 잊혀진 참전군인을 찾아내는 국가유공자 발굴사업

2014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난 지 64주년 되는 날 입니다. 6·25전쟁이라고 하면 정말 가슴아픈 대한민국의 한 역사인데요.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희생한 16만 2,394명의 국군 장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 13만 3천여 명은 아직도 한반도에 이름모를 땅 속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정말 미안하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부터 그들을 찾아 가족 품에 돌려주는 일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이하 국유단)'인데요. 국유단의 사업내용과 더불어 참전 64년만에야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신 이영식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6·25전쟁을 가슴속 깊이 새겨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25전사자의 가족을 찾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시작된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은 6.25전쟁 50주년 기념 호국보훈 사업의 일환으로 한시적으로 운영됐었는데요. 이후 2007년 1월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으로 정식 출범한 뒤 매년 1천구 이상의 유해를 발굴하며,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7,700여구의 국군 전사자를 발굴해냈습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호국용사 84명은 가족의 인도하에 국립현충원에 고이 잠들었습니다. 


현재 국유단은 8개의 발굴팀으로 구성돼 전국을 292개 권역으로 나눠 매년 발굴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전국에서 하루에 1천여 명의 장병들이 발굴 지원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땅이 얼어 있는 11~4월과 비가 많이 오는 7~8월을 제외하고 이루어지는 작업은 올해 4월부터 6월 말에 걸쳐 사단별로 안동 갈마봉(50사단), 정읍 내장산(35사단), 화천 백암산(7사단), 안양 병목안(51사단)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


그렇다면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유전자 감식인데요. 이를 위해 국유단은 발굴작업과 함께 '6·25전사자 유가족 찾기 행사'를 통한 유전자 시료 채취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올해 현충일에서도 '6·25전사자 유가족 찾기 행사'가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 등에서 유가족 방문객을 대상으로 채쥐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국유단 공보장교 배영아 소령은 "직계가족이 생존해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보다 많은 유전자 샘플 확보를 위해 앞으로 지역별 주요 행사(진해 군항제, 입영장병 환영행사 등) 기간 중 기동순회 채취작업을 보다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으며 지난 6월 중순부터 전국 255개 보건소에서 신청받던 시료 채취를 전국 1,283개 보건지소까지 확대해 유가족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채취에 참여한 유가족에게는 건강검진 서비스(5만원 상당)도 지원한다고 합니다.


한편 지난 6월 6일 현충일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추모사를 통해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서는 묘소를 국립묘지로 옮기고 위패를 모셔서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예우를 드릴 것"이라며 호국용사 유해발굴 사업에 더욱 진력해 마지막 용사까지 가족의 품으로 모실 것을 약속했는데요. 꼭 이 약속이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부주도 국가유공자 발굴사업

국가보훈처 ☎ 1577-0606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 http://www.mpva.go.kr/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홈페이지 : http://www.withcountry.mil.kr/



  아직도 생생한 이영식 어르신의 의무병 생활


"열일곱이었지요. 학교 친구, 동네 친구 8명이 함께 의무병으로 지원했던 때가요."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영식(81) 어르신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6년제였던 서울중학교(현 서울고) 3학년이었습니다.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살던 어르신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경기 용인 외가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 수복 이후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의 재회도 잠시, 그 해 11월 의무병 모집공고를 보고 동네 친구,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학도병 신분으로 의료병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역은 정전 후인 1956년 6월 30일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정부주도 국가유공자 사업'을 통해 참전 64년 만인 지난 3월에야 국가유공자로 선정됐습니다. 국가보훈처가 병적 자료를 근거로 '정부주도 국가유공자 발굴사업'을 벌인 결과 지난 6월 18일까지 개별 신상이 확인된 사람(2만 5,521) 가운데 국가유공자로 등록 가능한 6·25전쟁 참전용사 2,187명을 찾아냈습니다.

종전까지 국가유공자 등록은 본인의 신청에 의해 이뤄졌으나 6·25참전용사의 경우 이미 돌아가셨거나 생존하셔도 고령(평균 연령 84세)이어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음에 따라 올해부터 정부가 직접 찾아 나서게 된 것인데요. 그렇다면 왜 이영식 어르신은 그동안 국가유공자 등록을 하지 못하셨을까요?

이영식 어르신은 "그간 바쁘게 사느라 내가 국가유공자인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의 기억 속에는 아직 입대 무렵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데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6·25전쟁 학도병


"입대할 나이(20)가 아니니 군번이 있나요. 그냥 서류에 이름, 나이 등을 적고 다음날 새벽 재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지요.", "훈련교관이 종이봉투를 나눠주며 부모님 앞으로 편지를 쓰라 하대요. 손톱도 함께 잘라 넣고요. 사실상 유서였는데, 전쟁터에 나간다는 게 실감 나더군요."


의무병으로 지원한 이영식 어르신은 3주 가량의 교육을 받고 나자 재동초등학교 운동장에 새로 뽑은 의무병을 태우고 갈 군용트럭 몇 대가 줄줄이 들어왔습니다. 운동장에 나가 보니 다른 학도병 부모님들과 함께 어르신의 부모님도 오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님 곁을 떠나 어르신과 친구들이 도착한 곳은 강원 원주지역의 야전병원이었는데요.


"도착해 보니 천막 칠 곳에 말뚝 박은 게 전부였어요. 한쪽에 미국이 지원한 천막이며 의료장비가 쌓여 있었고요. 우리에게 천막을 치라는데, 망치조차 없더군요." 


당시 야전병원에서는 의과대 교수와 학생, 간호사 등이 수술과 치료를 맡았고, 학도 의료병들은 야전병원 시설 설치와 환자 수송, 약품 전달, 식사 준비 등을 맡았습니다. 밤낮없이 실려오는 부상자들, 난로를 피워도 뼛속까지 저린 추위, 밤이면 생각나는 부모님···, 끊임없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로 인해 야전병원에서도 역시 부상병들의 생사가 달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복부에 총상을 입은 부상병이 도착했어요. 살기 힘들 것 같았는데, 본인의 출혈 부위를 워낙 강하게 눌러 어느정도 지혈이 되고 복부에 박힌 총알이 피부를 뚫었을 뿐 장기 사이에 자리를 잡아 기적적으로 살아나더라고요."


6.25전쟁 의무병


어르신과 함께 의료병으로 지원했던 친구들 가운데 3명은 이후 육군 소위로 참전해 전사했습니다. 특히 서울중학교의 경우 6·25전쟁 기간인 1회부터 6회까지의 졸업생 1,178명 중 약 40%인 457명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35명이 전사했습니다.


어르신은 전역 후 야간고를 거쳐 1958년 동국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심한 결핵을 앓아 자퇴하셨으며, 이후 미군부대 군무원, 외국어학원 강사, 미국 공구업체 한국지사 근무 등을 거쳐 15년째 경기 의정부에서 작은 번역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어르신은 매일 서울 수유동 집에서 의정부까지 전철로 출퇴근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영식 어르신을 비롯한 국군 장병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모든 분들의 헌신과 지금도 그치지 않는 치열한 삶의 자세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서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분들을 찾아내어 좋은 곳에 모시고 또한 살아계시는 분들은 꼭 국가유공자로 등록하셨으면 좋겠습니다^^